후안 카를로스 전 스페인 국왕(왼쪽)과 펠리페 6세 현 국왕. EPA 연합뉴스
부패와 사생활 추문으로 얼룩진 후안 카를로스(82) 전 스페인 국왕이 조국을 떠난다. 스페인 민주화를 이끌었던 고령의 전 국왕이 사실상 ‘망명길’에 오른 셈이다.
카를로스 전 국왕은 3일 아들인 펠리페 6세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 “스페인을 떠나 외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부패 혐의 등을 조사하는 검찰이 부르면 응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카를로스가 머물 나라는 즉각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지 언론은 그가 더 이상 스페인에서는 살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이 서한에서 “내 사생활에서 과거 사건들이 불러일으키는 대중의 반발에 직면해 이 결정을 내렸다”며 아들이 국왕 역할을 평온하게 수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왕실은 성명을 내어, 펠리페 국왕이 전 국왕의 결정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스페인 대법원은 지난 6월 카를로스의 뇌물 수수 혐의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다. 스페인 건설회사들이 수주한 67억유로(약 9조4천억원)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초고속열차 건설 사업과 관련해, 사우디 전 국왕으로부터 1억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다.
이 뇌물은 카를로스 전 국왕의 연인인 독일인 사업가 코리나 라르센 등을 통해 전달되고 돈세탁이 되던 중 스위스 검찰에 의해 포착됐다. 카를로스는 2012년 보츠와나에서 라르센과 여행을 떠나 코끼리 사냥을 즐기다 골절상을 당해 혼외 관계가 드러났다. 그 후 딸과 사위마저 부패 사건에 연루돼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2014년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카를로스의 잇따른 추문에 펠리페 6세는 지난 3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카를로스의 연금도 취소했다. 카를로스 추문으로 국민들 사이에서 왕실 폐지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35년간 스페인을 통치한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죽은 뒤 1975년 왕위에 올랐다. 이후 권력을 내각에 완전히 이양하는 등 입헌군주제를 정착시키며 스페인 민주화를 선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스페인의 민주화를 인도한 국왕이 치욕스러운 망명길에 올라 외국에서 생을 마치게 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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