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부총재 유력’ 린이푸 베이징대 교수
‘세계은행 부총재 유력’ 린이푸 베이징대 교수
중국 경제개발계획의 청사진을 제시한 린이푸(56·사진) 베이징대 교수가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경제학자로 발탁될 것으로 알려졌다고 20일 <신화통신>이 전했다. 중국 경제학계의 ‘거두’로 통하는 그는 본디 대만군에서 승승장구하던 엘리트였으나, 중국으로 망명해 이름까지 바꾼 인물이다. 대만에선 지금도 그를 탈영병으로 간주한다.
대만 군 간부서 중국으로
베이징대-미 유학 거쳐
중 경제개발 ‘두뇌’로 명성 대만 이란현에서 태어난 그는 ‘린정이’라는 이름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는 가난한 형편에서도 뛰어난 성적으로 명문 대만대에 입학했다. 군사훈련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는 엘리트 간부를 육성하려는 군 당국의 눈에 띄어 장교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국방부장과 행정원장을 차례로 지낸 장징궈(장경국) 총통도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군의 지원으로 정치대에서 기업관리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1978년 대만의 최전방 진먼도(금문도)에 연대장으로 파견된다. 진먼도는 당시 대만을 방문한 외국 귀빈들이 꼭 찾는 곳이었다. 대만 군으로선 중국과의 최전방에 최고의 엘리트를 배치한 셈이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그는 대만을 ‘배신’한다. 대만군 병력배치도 등 기밀문서를 들고 야음을 틈타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는 당시 농구공 하나에 의지해 2㎞를 헤엄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망명 동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개방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만군과 주고받던 진먼도 포격전도 중단하면서 대만에 화해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반면, 대만은 중국에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중국의 이런 정책 변화와 대만의 억압적 분위기가 그의 망명 동기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중국에 망명한 그는 ‘린이푸’로 이름을 바꾸고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는다. 그리곤 당시 교환교수로 베이징대에 와 있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시어도어 슐츠의 후원으로 시카고대에 유학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어 예일대에서 박사후 과정까지 마친 그는 미국 대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베이징대로 돌아와 중국경제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는 등 주룽지 전 총리의 ‘두뇌’로 명성을 떨친다. 대만군은 2002년에서야 그의 망명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탈영·투항 혐의로 수배령을 내린다. 그가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경제학자로 지명되면 명실상부한 석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자리는 지금까지 로렌스 서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니콜라스 스턴 등 서방 경제학자들의 무대였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개발을 이끈 그의 경험이 저개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베이징대-미 유학 거쳐
중 경제개발 ‘두뇌’로 명성 대만 이란현에서 태어난 그는 ‘린정이’라는 이름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는 가난한 형편에서도 뛰어난 성적으로 명문 대만대에 입학했다. 군사훈련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그는 엘리트 간부를 육성하려는 군 당국의 눈에 띄어 장교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국방부장과 행정원장을 차례로 지낸 장징궈(장경국) 총통도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군의 지원으로 정치대에서 기업관리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1978년 대만의 최전방 진먼도(금문도)에 연대장으로 파견된다. 진먼도는 당시 대만을 방문한 외국 귀빈들이 꼭 찾는 곳이었다. 대만 군으로선 중국과의 최전방에 최고의 엘리트를 배치한 셈이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그는 대만을 ‘배신’한다. 대만군 병력배치도 등 기밀문서를 들고 야음을 틈타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는 당시 농구공 하나에 의지해 2㎞를 헤엄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망명 동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개방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대만군과 주고받던 진먼도 포격전도 중단하면서 대만에 화해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반면, 대만은 중국에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중국의 이런 정책 변화와 대만의 억압적 분위기가 그의 망명 동기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중국에 망명한 그는 ‘린이푸’로 이름을 바꾸고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는다. 그리곤 당시 교환교수로 베이징대에 와 있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시어도어 슐츠의 후원으로 시카고대에 유학해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어 예일대에서 박사후 과정까지 마친 그는 미국 대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베이징대로 돌아와 중국경제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는 등 주룽지 전 총리의 ‘두뇌’로 명성을 떨친다. 대만군은 2002년에서야 그의 망명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탈영·투항 혐의로 수배령을 내린다. 그가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경제학자로 지명되면 명실상부한 석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자리는 지금까지 로렌스 서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니콜라스 스턴 등 서방 경제학자들의 무대였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개발을 이끈 그의 경험이 저개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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