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물결 30여년이 흐른 지금, 동북아 각국 정치경제는 기존 ‘무역 파트너’ 관계에 거친 파열음을 내면서 패권 각축전에 접어들고 있다. 포퓰리즘 정치가 경제·무역 위에 군림하면서 시장에서 결정되는 환율조차 무기화하는 등 세력재편 다툼이 극한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곧바로 직접적 영향권에 들어서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일 경제갈등을 포함해 지역·국가 간 무역전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가 촉발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국제 무역컨설팅회사 ‘이퀀트 애널리틱스’의 설립자인 리베카 하딩은 2017년 말에 펴낸 <무역의 무기화: 정치와 경제의 거대한 불균형>에서 이미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무역’을 둘러싼 정치적 어휘가 확연히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무역이 글로벌 경제의 회복·성장을 촉진하는 상호호혜 메커니즘에서 ‘전쟁의 언어’로 중대 전환이 일어났고, 이전의 무역 파트너는 이제 무역 적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역은 단순히 경제를 넘어, 국가의 강압과 전략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정치가 무역을 지배하면서 불신과 보복이 점증하는 양상이다.
리베카 하딩은 “지난 30여년간 ‘모두를 위한 무역·시장 기회’ 대신에 이제는 국가 이익을 위한 적대적인 격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며, 금융위기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돼온 포퓰리즘을 그 배경으로 꼽았다. 포퓰리즘 정치는 흔히 무역을 가장 유효하고 매력적인 수단으로 동원하기 마련이다. 불공정하고 적대적인 무역 상대국의 공격 탓에 사회 내부 불평등이 심화되고 일자리 감소, 임금 정체가 발생했다는 식의 레토릭(말치장)을 구호로 앞세운다. 트럼프와 아베 정부도 이런 포퓰리즘에 편승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중국은 수차례에 걸친 보복과 맞보복 관세전쟁에서 이제 거의 모든 상대방 수입제품에 추가 관세를 물렸다. 동원 가능한 실탄이 다 소진되자, 수요-공급의 시장원리로 결정되는 통화가격(환율)에까지 확전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정치리스크 분석 싱크탱크인 유라시아그룹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은 정치적 행위”라며 “보복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주요 교역국에 대한 적대 행위”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시장조사기관인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중국 당국이 시장에 개입해 위안화 약세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환율을 효과적으로 무기화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역사적으로 1985년과 1995년에 미국 경제를 구하기 위해 독일 마르크화 및 일본 엔화의 가치를 대폭 조정한 환율 ‘합의’(플라자합의 및 역플라자합의)가 이뤄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또다른 공세 및 방어 수단으로 환율을 무기화하는 경향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정부의 한국 수출규제도 정치가 노골적으로 무역에 강압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미-중 갈등이 관세·환율·안보에 걸친 체제경쟁으로 진행되면 장기화될 공산이 크고, 위안화 변동에 구조적으로 동조현상을 보이는 원화 절하도 증폭되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도 환율 압박에 나설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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