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시민들이 11일 미국계 독립 방송 규제를 겨냥한 미디어법이 통과된 하원 앞에서 법안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법치주의 훼손과 인권 억압 등으로 국내는 물론 유럽연합(EU)의 비판을 받고 있는 폴란드가 정부에 비판적인 미국계 방송에 대한 규제를 겨냥한 미디어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켜, 주요 우방인 미국과도 갈등을 빚고 있다.
폴란드 하원은 11일 유럽 33개국이 포함된 ‘유럽경제지역’(EEA) 소속이 아닌 개인이나 기업이 자국 내 언론의 지배 주주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찬성 228표, 반대 216표, 기권 10표로 통과시켰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 법안이 발효되려면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원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상원은 시행 시기 연기나 법안 일부 수정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어서 하원의 의도가 거의 관철될 전망이라고 <에이피>(AP) 통신이 지적했다.
이 법안의 적용 대상 언론은 뉴스 전문 방송인 <티브이엔(TVN)24>뿐이다. 이 때문에 이 방송을 침묵시키기 위한 법안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방송은 오는 9월26일 방송 사업 허가 재승인을 앞두고 있으며, 최대 주주는 미국 미디어 기업인 디스커버리다. 디스커버리는 유럽계가 아닌 주주의 지분이 49%를 넘을 수 없도록 한 기존 법을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등록된 기업을 통해 방송을 소유하고 있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이런 우회 소유를 차단하는 것이다. 법안이 정식 시행되면 디스커버리로서는 지분을 매각하는 수밖에 없다.
최대 야당인 ‘시민 플랫폼’의 그제고시 스헤티나 의원은 트위터에 쓴 글에서 “(법안 표결 처리는) 자유에 대한 공격이며 정부에서 독립된 언론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법안 처리를 앞두고 많은 시민이 의회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크라쿠프 등 5개 도시에서도 동시에 반대 시위가 진행됐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던 동맹당이 법안 표결 전 연정 탈퇴를 선언해, 우파 연정도 깨지게 됐다.
디스커버리는 미디어 법안이 “언론 자유와 미디어 독립성이라는 핵심 민주 원칙에 대한 공격이자, (이 방송의 모회사인) 티브이엔과 디스커버리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법안 통과 직후 성명을 내어 우려를 표명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 법안이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한편 폴란드의 투자 환경도 악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 정부 대변인은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있는 규정과 비슷한 내용을 추가한 것뿐”이라며 “폴란드는 의회가 합당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자본을 규제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하원은 또 이날 정부의 재산 몰수 조처가 30년을 경과하면 해당 조처를 무효화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이미 상원을 거쳤으며 안제이 두다 대통령의 서명을 거치면 발효된다. 이 법안은 나치 독일에 재산을 빼앗긴 유대인 등이 재산을 되찾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어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반발을 샀다. 야이르 라피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 법안이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고, 희생자의 권리를 지키려는 데 해악을 끼친다”고 비판했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두다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폴란드는 2015년 두다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사법 개혁안을 단행하고 낙태를 사실상 금지시키는 등의 인권 억압 조처를 취해 유럽연합과 갈등을 빚어왔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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