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여당인 필리핀민주당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가 주도한 마약 단속이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받게 됐다. 산페르난도/AP 연합뉴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필리핀 정부가 3년 동안 벌인 ‘마약과 전쟁’에 대한 반인도주의 범죄 조사에 공식 착수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 중심의 국제 조약에 따라 2003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된 반인도 국제 범죄 처벌 기관이다. 현재 전세계 12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한 상태이며, 미국,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등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 재판소는 현재 수단,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 14개 지역에서 발생한 반인도·전쟁 범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15일 자료를 내어 재판소 판사들이 2016년 7월부터 2019년 3월까지 필리핀 정부가 벌인 마약 사범 단속 행위에 대한 공식 조사 요청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재판소 판사들은 “(필리핀 정부의)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은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볼 수 없다”며 이는 민간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과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6월14일 이 재판소의 파투 벤수다 검사장은 2018년 2월부터 진행한 예비 조사 결과,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믿을,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며 정식 조사 개시를 요청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2016년 당선 직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혐의자를 사살하라고 공개적으로 명령했다. 이에 따라 그 해 7월 이후 시작된 20만 번 이상의 마약 단속 작전에서 6천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인권단체들은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몇 배 많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필리핀은 벤수다 검사장이 예비 조사에 착수한 직후인 2018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 관련 조약에서 탈퇴했으나, 조사 대상 기간 중에는 가입국이었기 때문에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 권한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재판소는 밝혔다.
인권 단체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살인적 폭력을 촉발했으며 경찰들은 무장도 하지 않은 이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두테르테 정부는 경찰에 내린 명령은 정당방위 성격의 조처라고 반박했다. 특히,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7월 “내 나라를 파괴하는 이들을 내가 살해할 것이라는 점을 국제형사재판소가 기록해도 그만이다”라고 말하는 등 국제형사재판소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필리핀 정부 대변인도 이날 공식 조사에 협조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임기는 내년으로 끝나지만, 그는 대통령 6년 단임제 규정을 피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하겠다고 지난달 선언했다. 또 지난 8일에는 여당인 필리핀민주당으로부터 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그와 함께 출마할 대통령 후보로는 그의 측근인 크리스토퍼 고 상원의원이 지명됐지만, 고 의원은 후보 수락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두테르테의 딸이자 다바오시 시장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가 대신 출마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사라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최근 “아버지와 나는 둘 중 한 명만 대선에 나서기로 했다”며 대통령 선거 출마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두테르테는 인권 탄압 논란 속에서도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부통령으로 권력을 이어갈 경우, 필리핀의 기존 마약 단속 정책이 지속될 것으로 인권 단체들은 우려하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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