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실장이 12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만나 한-미 안보실장 협의를 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공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12일(현지시각)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한국전쟁 종전선언에 관한 정부 구상을 상세히 설명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입구로서 추진하고 있는 종전선언에 유보적인 조 바이든 미 행정부를 상대로 막판 설득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 실장은 이날 설리번 보좌관과 1시간20분 동안 한-미 안보실장 협의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한반도 비핵화, 역대 평화·안정에 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며 “종전선언에 대한 우리 쪽 구상을 설명했고, 양쪽이 긴밀히 논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미국 정부 역시 한반도 평화 진전을 위해 커다란 관심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다시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협의에서 서 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말 유엔(UN)총회 연설에서 거듭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해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종전선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이해를 넓혀 동참을 이끌어내려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앞선 유엔총회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 당국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전선언 구상에 관해 설명했고, (미국이) 우리 쪽 입장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종전선언을 대통령이 제안한 이유, 그걸 어떻게 추진했으면 좋겠다는 구상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계속 논의해 나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는 아직까지 종전선언의 취지와 의도에 대해 한-미 사이에 온도 차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이 당국자는 이어 “종전선언은 비핵화와 무관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일종의 ‘정치적 선언’인 종전선언은 비핵화의 입구, 비핵화의 문을 여는 출발”이라며 “비핵화 과정과 함께 논의돼야 하는 사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협의에서 서 실장은 미국 쪽에 종전선언은 북한에 조건 없이 선제적으로 내주는 ‘선물’이 아니라, 비핵화 논의의 ‘촉매제’로서 비핵화 과정과 연동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을 거듭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에 대해선 “아직 반응을 얘기할 단계는 아니다. 의견을 나눴고, 계속 논의해 나가자는 게 현재까지의 정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종전선언에 적극성을 안 보인다’는 질문에는 “(미국이) 종전선언을 안 한다는 얘기는 아직 나온 적 없는 같은데”라고 되물으며, 미국 또한 종전선언을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내비쳤다. 또다른 주요 현안인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선 “결코 이벤트성으로 할 생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며 “한다면 회담 결과로서 실효성 있는 내용을 만들어 내야 한다. 회담을 위한 회담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현 정부 입장에선 남은 임기 동안 어떻게 남북관계나 한반도, 비핵화 상황을 안정화시켜 다음 정부로 넘겨주느냐가 가장 큰 하나의 목표”라며 “많은 분들이 혹시 우려할 수도 있는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무리할 생각도 없고 서두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직통연락선이 복원됐지만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 협의가 가능한 화상 회의 시스템은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미국 쪽은 이날 협의에서 북한을 적대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보도자료에서 “미측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이 없다는 미측의 진정성을 재확인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북한과 만나서 협상을 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고 전했다. 또 “한-미 양국이 구체적인 대북 관여 방안에 대해 앞으로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이날 한-미 안보실장 협의는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지난 11일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 연설에서 “미국이 우리 국가에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는 사실이 전날 <노동신문> 보도로 알려진 와중에 이뤄졌다. 이날 협의에서 김 총비서의 연설 내용도 간략하지만 다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한-미는 미국에게 대북 적대 의도가 없음을 ‘행동적 근거’로 보여달라는 북한의 요구에 대해 “언제든 북한과 만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다시 강조하는 것으로 대답한 모습이 됐다. 특히 청와대 국가안보실 보도자료에서 ‘미국의 진정성’을 재확인했다는 표현을 쓴 점이 눈에 띈다. 미국이 북한에 겉치장용 언사만 던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부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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