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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소련’을 잊고서, 이 시대의 절박함을 헤아릴 수 있을까

등록 2021-12-27 04:59수정 2021-12-27 09:16

[기고] ‘다시 사회주의를 말하다’
소련식 모델, 뭐가 잘못됐나?
소련이 퇴장하며 남긴 숙제들
한 세대 넘도록 해결 못하는 세계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곳곳에 세워졌던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겨레> 자료사진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곳곳에 세워졌던 레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겨레> 자료사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며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한 시대가 끝났을 때, ‘좌파’나 ‘사회주의’ 같은 말 언저리에라도 있었던 전세계의 모든 흐름과 세력은 두가지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20세기 내내 ‘사회주의’와 등치됐던 소련식 사회 모델에서 잘못된 게 무엇인지 밝히고, 이 모델과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비전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때 추앙받았던 소련의 모든 것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해야 했다. 구소련은 자본주의만큼이나 신랄하게 공격하고 거리를 둬야 할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과제가 더 있었다. 그것은 지구상에 ‘소련’이 존재했기에 등장하고 유지되던 세력 균형을 그 ‘소련’이 존재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지탱하는 일이었다. 보통선거제도의 확산, 파시즘의 패배,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 복지국가의 등장, 이 모두는 소련이 버티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거대한 변화다. 가장 보수적인 논자조차 이런 변화가 성사되는 데 소련의 존재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이라는 무게추 덕분에 세력 관계의 저울은 그래도 조금은, 가진 자들 쪽으로 덜 기울었다. 그렇다면 지도에서 소련이 사라진 세계에서 누군가에게는 이 나라를 대신할 또 다른 무게추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곧바로 결론을 말하면, 두 과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다. 소련이 해체되고 30년이 지났는데도 그렇다. 사회민주주의에서 출발하든 아니면 더 급진적인 흐름이든, 민주주의를 다시 바라보고 생태주의나 페미니즘의 문제 제기와 성과를 받아들여 21세기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시도도 하나 이상의 국가에서 세계인의 참고가 될 만한 모범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는 악몽쯤으로 치부되는 소련의 5개년 계획이 그래도 대공황의 해일에 휩쓸린 동시대인들을 향해 흔들었던 것과 같은 영감과 희망의 깃발은 아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과제의 경우, 현실은 더 참담하다. 소련이 사라진 세상에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전지구적 세력 균형은 급속히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잔존한 ‘사회주의’ 대국인 중국은 수억의 노동력을 지구자본주의 노동시장에 풀어놓음으로써 이 변동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심지어는 북유럽 국가들에서조차 노동조합은 수십년째 양보교섭을 거듭하고 있고, 노동계급은 이미 ‘계급’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패배의 사연들로 갈라져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초래했지만 정작 자본주의는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후 재난과 극단적 불평등이 인류를 덮치는 시대이고,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 쪽에서 어떠한 대규모 혁신도 출현하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이 퇴장하며 남긴 숙제가 한 세대 넘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출구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소련’을 잊고서는 이 시대의 가난함과 절박함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시야를 대한민국으로 좁히면, 이야기는 더욱 답답해진다. 소련이 무너질 때 막 걸음마를 떼던 남한 좌파는 위 두 과제와 대결할 능력이 없었다. 정신적 고아 상태에서 시작해 소련 국정 교과서 정도나 읽은 수준으로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조차 분별하기 힘들었다. 뒤늦게 소련 공산당 노선 외의 마르크스주의 사조나 사회주의 흐름을 찾아 학습해야 했고, 이런 벌충 작업의 열기조차 몇년 안 가 수그러들고 말았다. 대다수는 가장 편한 해법을 선택했다. 고민 자체를 버렸다. ‘사회주의’는 이제 표어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민주주의’나 ‘진보’였다. 어느덧 안정된 중산층 지위에 올라선 사람들에게는 이런 언어만으로도 충분했다.

간혹 ‘사회민주주의’를 말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그 본고장과는 달리 이념의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운동에 깊이 뿌리내린 사회주의의 한 지류였다. 소련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둘러싼 고민을 던져버리고 자본주의에 환호할 만반의 준비가 된 이들의 변명거리로 오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모든 포기와 실패, 정체와 궁지의 잠정 결산을 내보자. 그러면 패배자들의 거대한 그림자와 마주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지지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다수는 아직은 커다란 변화가 없어도 만족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때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벅찬 이야기와 얽혀 당당히 자기 이름을 가졌으나 지금은 존재조차 식별되지 못하는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이제 ‘피해 대중’이나 ‘비정규직’ 같은 이름으로만 분류된다. ‘민주주의’와 ‘진보’가 이념의 왼쪽 경계인 사회에서 이들이 패배자의 운명을 반전시킬 무기는 무엇인가? 그런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없다면, 있게 해야 한다. 뭐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소련은 없다. 소련식 사회주의도 추억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투명인간이 더는 투명하지 않으려면, ‘민주주의’와 ‘진보’에만 머물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좁은 상식과 상상력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이 흐름이 다시 ‘사회주의’라 불릴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름이 뭐든 그것은 분명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며 현재의 패배자 입장에서 세계를 재편하자는 외침일 것이기 때문이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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