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 오염에 휩싸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보스니아의 정치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위기에 처했다. 사라예보/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유럽과 러시아의 대결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사이 ‘동유럽의 변방’으로 취급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에서도 전쟁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민족 갈등이 폭발하며, 이 나라에선 30년 전 피비린내 나는 4년간의 전쟁이 벌어졌었다. 당시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도 전에 다시 분열과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스니아의 위기는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자치공화국이 분리 독립 움직임을 보이면서 촉발됐다. 1995년 국제 중재로 전쟁을 끝내고 가까스로 합의한 ‘한 지붕 세 민족’의 불안한 동거가 깨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현재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계(인구의 50%),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31%), 가톨릭교도인 크로아티아계(15%)의 공동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세르비아계의 독립 움직임은 지난달 9일 스릅스카 자치공화국 건립 30돌을 계기로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이날 바냐루카에서 기념식을 열고 800여명의 무장 경찰이 참가하는 퍼레이드 행사까지 벌였다. 이날 행사는 스릅스카 공화국 건국일을 국경일로 기념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한 채 강행됐다. 세르비아계를 대표하는 밀로라드 도디크 보스니아 공동대통령은 기념식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갖지 못하면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안다”며 “스릅스카 공화국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나라”라고 말했다.
1992년 1월 스릅스카 공화국 건립 선언이 4년에 걸친 보스니아 전쟁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이날 기념식은 보스니아계나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에게는 노골적인 도발 행위로 비쳤다. <알자지라> 방송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는 이날이 자유를 뜻하는 국경일이지만, 보스니아계 주민들로서는 전쟁의 공포가 시작된 날”이라고 지적했다.
보스니아는 1992년까지 현재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던 나라다.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은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했지만, 보스니아는 1995년까지 4년 동안 전쟁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0만명 이상이 숨졌다. 1995년 세르비아계가 스릅스카 공화국 내 보스니아계 주민 8천여명을 학살한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은 전쟁 중에 자행된 대표적인 인종 청소 사건으로 꼽힌다.
세르비아계의 도발은 국제적인 항의 시위를 촉발했다. 이튿날인 10일 미국과 유럽 등 14개 나라 35개 도시에서는 세르비아계의 분리 움직임을 저지해야 한다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조직한 ‘플랫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95년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세르비아계의 분리 움직임에) 극도의 당혹감을 느낀다”며 “많은 이들은 나라가 또다시 분열과 갈등으로 빠져들 것을 걱정한다”고 지적했다.
주요국의 경고와 견제도 이어졌다. 미국은 지난달 5일 도디크 공동대통령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유엔은 지난달 12일과 14일 잇따라 혐오 발언과 폭력 자제를 촉구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만나, 보스니아 3자간 대화를 주선하기로 합의했다.
1992년부터 4년간 이어진 보스니아 전쟁은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2년 5월 보스니아의 민병대원이 사라예보 인근 산악지역에서 달려가고 있다. 사라예보/AP 연합뉴스
세르비아계의 분리 움직임은 지난해 7월23일 발렌틴 인츠코 ‘보스니아 고위대표’가 과거의 인종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를 금지시킨 형법 개정안 시행을 선언하면서 표면화했다. 보스니아 고위대표는 보스니아 전쟁을 끝내면서 체결된 ‘데이턴 평화협정’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치인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는 직책이다. 식민지의 총독을 연상시키는 고위대표는 법 제·개정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실제로 법 개정에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세르비아계는 이 법이 자신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공동 대통령직과 연방 정부·의회 참여를 거부하겠다고 맞섰다. 보스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의 3자 합의로 운영되는 정부를 사실상 마비시킨 것이다. 지난해 연말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올해 5월까지 스릅스카 공화국에 자체 준정부기구와 군대를 설립하는 내용의 법안을 자치공화국 의회에서 잇따라 통과시켰다.
국제사회의 압박이 이어지자 스릅스카 공화국은 지난 1일 연방 정부에 다시 참여하기로 했으나, 개정된 형법의 남용을 막을 법적 장치를 요구 조건으로 내세우며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이 문제가 다시금 치열한 민족 간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스니아 전쟁 기간에 벌어진 인종 청소의 역사가 말끔히 청산되지 않은 탓이다. 대표적인 인종 청소 사건인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의 경우 처벌이 마무리되는 데만도 무려 26년이 걸렸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지난해 6월 라트코 믈라디치 옛 세르비아계 사령관에 대한 종신형을 확정함으로써 이 사건 처리를 마무리했다.
이 사건보다 덜 알려진 수많은 전쟁범죄에 대해선 여전히 진실 규명과 처벌·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지난해 4월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 중인 전쟁범죄만도 600건에 이른다. 앰네스티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는 걸 가로막는 걸림돌이 너무나 많고 고문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률도 제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스레브레니차 사건을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여기엔 다시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피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부인하거나 이 사건 관련 정보를 믿지 않는 것은 세르비아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분리 독립 움직임을 이끌고 있는 밀로라드 도디크 보스니아 공동대통령. 위키백과 자료
보스니아 위기는 유럽연합이 보스니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데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많은 보스니아인들은 오랜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는 유일한 해법이 유럽연합 가입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유럽연합에 가입할 전망이 잘 보이지 않자 ‘다른 길’을 모색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슬람교도들과 갈라서려는 세르비아계 분리 독립 움직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같은 보스니아의 실망감은 친유럽연합 성향을 보여온 보스니아 이슬람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무스타파 체리치의 태도 변화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체리치는 지난해 10월 러시아의 체첸 공화국을 방문한 뒤 공개적으로 유럽연합을 비판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쓴 글에서 “러시아는 체첸 분쟁 이후 체첸 통합에 적극 나선 반면 유럽연합은 보스니아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연합 지도자들에게 “체첸에 와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어떻게 체첸과 협력하는지 보고 배우라”고 냉소적으로 일갈했다.
함자 카르치치 사라예보대학 부교수(정치학)는 이런 태도 변화는 유럽연합에 대한 이슬람교도들의 의구심을 대변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스니아의 정치 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유럽연합 가입 가능성이었다”며 가입 전망이 불투명해지면 정치 개혁의 의지도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스니아는 2016년 2월 유럽연합에 가입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했다. 이는 유럽연합이 2003년 발칸반도 지역 국가들에 제시한 정치 개혁 등의 가입 기준을 충족시켰다는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유럽연합은 이후 3년 동안 보스니아 상황을 검토한 뒤 2019년 정치 투명성 확보, 법치주의 강화, 헌법재판소 개혁, 표현의 자유 보장 등 14가지 조건을 다시 제시했으나, 최근에는 논의 자체가 중단됐다.
유럽연합 가입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보스니아 내에서 유럽연합에 대한 지지 여론도 줄고 있다. 2014년에는 인구의 85%가 유럽연합 가입을 지지했으나, 2020년 보스니아 유럽통합청의 여론조사에서는 75%까지 떨어졌다. 다미르 카피지치 사라예보대학 부교수(정치학)는 “(최근 분리 움직임을 이끄는) 도디크 공동대통령도 애초에는 개혁주의자였으나 차츰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게 됐다.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게 선거에서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유럽연합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을 벗어날 희망이 사그라지는 땅에서 분열과 갈등의 정치가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1월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첫 작전 80돌 기념식 장면. 종전 뒤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1992년 7개 나라로 나뉘었다. 이그만/AF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