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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사유리 아기가 ‘정자기증 아빠’ 찾는다면?…세계는 논쟁 중

등록 2022-06-21 05:00수정 2022-06-21 15:53

가정용 유전자(DNA) 검사 키트 보급
정자 기증 익명 유지 어렵고 의미 퇴색
영국 감독청 “사회적 대화 시작할 때”

2017년 기증자 익명 보장 철회한 호주
기증자 정보 제공 기본 절차로 여겨
‘사유리 사례’ 계기 국내도 관심 높아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젠과 엄마 사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젠과 엄마 사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딸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 권리를 포기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가 했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권리를 (당사자가 아닌) 내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지난달 31일(현지시각)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7살 된 딸을 키운 싱글 맘 도러시 번의 칼럼을 실었다. 방송사에서 일한 언론인이기도 한 이 여성은 1995년 기증받은 정자로 딸을 낳았다. 그는 “아이가 감정적으로 덜 복잡할 것”이란 의사의 권유로 기증자의 신원을 익명화하는 데 합의하고 정자를 기증받았다. 하지만 딸이 성인이 된 지금, 자신의 결정에 ‘윤리적 결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는 정자를 받을 때 기증자 신원을 ‘반드시’ 익명으로 하게 했던 당시 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됐다.

2020년 12월 정자 기증을 받아 아들 젠을 낳은 방송인 사유리의 소식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기증을 통한 출생’에 관심이 높아졌다. 수십년 전부터 정자 기증을 합법화하고 기증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서구 사회에서는 지금 어떤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까.

1991년 관련 법과 감독기관을 만들고 기증을 통한 출생을 합법화한 영국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관련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피터 톰슨 영국 ‘인간의 수정 및 배아 감독청’( Human Fertilisation & Embryology Authority·HFEA, 이하 영국 감독청) 대표가 지난 5월 정자 기증 시 기증자의 신원을 익명으로 하도록 한 법을 개정할지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가디언>은 영국 감독청이 출생자가 18살 이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기증자 신원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법 개정을 검토하는 중이며, 협의를 거쳐 올해 말까지 입법 초안을 의회에 제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가정용 유전자(DNA) 검사 키트(‘23앤드미’ 제품)를 통해 자신의 생물학적 형제자매를 찾는 데 성공한 영국인 너태샤. 비비시 화면 갈무리
가정용 유전자(DNA) 검사 키트(‘23앤드미’ 제품)를 통해 자신의 생물학적 형제자매를 찾는 데 성공한 영국인 너태샤. 비비시 화면 갈무리

가정용 유전자 검사 시대, 익명 가능할까

“누구나 자신의 생물학적 기원을 알 권리가 있다. 기증을 통해 태어난 이들도 마찬가지다.” “가족력 질환 등에 대처하기 위해 자녀가 원할 경우 기증자 신원에 접근하게 해야 한다.”(개정 찬성 의견)

“기증자 익명성을 유지해야 자발적 기증이 가능하다. 도러시의 딸도 지금의 법 덕분에 태어났다.” “자유롭게 기증자를 찾게 된다면 가족 체계에 혼란이 올 것이다.”(개정 반대 의견)

<가디언>은 지난달 도러시 번의 칼럼을 실은 뒤 전자우편을 통해 300자 안팎의 독자 의견이 도착했다며 그중 일부를 누리집에 공개했다. 기증자 신원에 대해 익명성을 보장하도록 하는 현행법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함을 알 수 있다.

영국은 1991년 만든 ‘수정 및 배아 발생에 관한 법률’(HFE Act)을 통해 기증을 통한 출생 절차에서 정자·난자·배아 등을 기증한 이의 신원은 반드시 익명으로 하도록 명문화했다. 이 법은 2005년 한차례 개정돼 출생자가 18살이 됐을 때 원하면 기증자 신원을 알 수 있게 했다. 이 법을 한번 더 개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법 개정 전인 1991~2005년 사이에 기증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과 18살 이전이지만 기증자 신원을 알고 싶어 하는 이와 그들의 보호자들이다. 가족력 질환 등 건강상의 문제나 근원적 호기심 등으로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나 형제자매를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은 끊이지 않는다.

영국 정부가 최근 법 개정을 두고 고민에 빠진 이유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간편한 가정용 유전자(DNA) 검사 키트가 널리 보급되면서다. 생명공학 업체 셀마크사의 누리집을 보면 100유로(약 13만6천원) 안팎에 가정용 유전자 검사 키트를 손쉽게 살 수 있다. 23앤드미, 앤세스트리 등에서 다양한 키트를 시장에 내놓았다. 구매자는 키트 안 면봉으로 뺨 안쪽을 문질러 세포를 묻힌 뒤 봉투에 담아 업체에 보내면 자신의 유전자 정보가 상세히 담긴 검사 결과지를 받아볼 수 있다.

영국 국영방송 <비비시>(BBC)는 2020년 1월 ‘익명 정자 기증과 나 그리고 디엔에이 테스트’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도했다. 출연자 너태샤는 자신이 정자 기증 제도를 통해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제도상 기증자 신원의 익명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너태샤는 어머니와 함께 간편한 가정용 유전자 검사를 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생물학적 형제자매를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방송은 2019년까지 가정용 유전자 검사기를 산 이가 전세계 약 2600만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투리 킹 레스터대학 교수(유전학)는 영국 감독청에 기고한 글에서 “유전자 검사 키트가 생일 선물이나 성탄절 선물로 팔리는 시대다. 소비자에게 직접 가는 검사 키트와 생명공학 회사들이 갖고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인해 기증자가 익명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서로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침을 받는 튜브(면봉)와 컴퓨터뿐”이라고 말했다. 톰슨 대표 역시 지난달 20일 <가디언> 인터뷰에서 “유전자 검사의 급속한 증가로 기증자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곧 불가능해질 것이며, 저렴한 유전자 매칭 서비스는 기부자 익명성 유지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것은 큰 변화다. 비밀이 불가능해지는 미래에는 가족 개념에 대한 태도가 어떻든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지금 책임감 있게 해야 할 일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법은 새로운 현실과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기증자 익명화 의무 없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빅토리아주는 영국보다 먼저 결단을 내렸다. 빅토리아주는 1988년 제정한 ‘보조생식법’을 2017년 개정해 기증을 통해 태어난 이들이 나이와 관계없이 기증자의 신원에 접근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과거 기증자가 누군지 알 수 없게 했던 기간에 태어난 이들도 2017년 개정 후 소급 입법 적용으로 같은 권리를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재생산청(VARTA)은 기증자와 기증을 받아 태어난 사람을 기관에 등록하게 해 이들 간의 ‘연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8살 이상은 원하면 바로 기증자의 신원과 연락처 등 식별 정보를 알 수 있고, 18살 미만은 보호자 동의 아래 정보를 제공받는다.

재생산청은 누리집에 “빅토리아주에서는 수천명이 정자·난자·배아 기증을 통해 태어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이들은 과거 유전적 정보 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당국에 보고됐다. 하지만 오늘날 기증을 통해 태어난 이들에게 기증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기증 절차에서 기본적인 부분으로 고려된다”고 밝혔다.

오스트레일리아 공영방송 <에이비시>(ABC)는 지난해 11월 ‘나의 아버지를 찾아서: 기증을 통해 태어난 아이의 권리란 무엇인가’를 방송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로런 번스 디시에이(DCA·Donor Conceived Australia, 기증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비영리단체) 이사는 2017년 법 개정을 위한 캠페인에 앞장섰다. 자기도 기증을 통해 태어났으며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은 경험이 있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생물학적 정보에 대한 접근이 거부됐던 이들에게 국가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미국·캐나다·독일·일본·대만 등 상당수 나라에서 기증을 통한 출생을 관련 법과 행정기관을 통해 합법화하고 있다. 기증을 통해 태어난 이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2000년 설립된 국제 비영리단체 ‘기증자 형제자매 등록 협회’(The Donor Sibling Registry·DSR) 설립자 웬디 크레이머는 누리집에 “그동안 의료 산업들이 주로 영리 목적으로 기증을 통한 출생 절차를 진행했을 뿐, 이를 통해 태어난 이들의 인도적 권리를 높이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기증으로 태어난 이들과 이들 가족의 권리를 높이기 위한 논의를 공론장에 올리는 것이 지금 우리의 임무”라고 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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