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동부 슬로우얀스크의 주민이 공용 식수 시설에서 플라스틱 통에 물을 담고 있다. 슬로우얀스크/AP 연합뉴스
다섯달 이상 이어진 전투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북부의 주민들이 ‘폐허의 인질’ 신세가 된 채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끝없는 폭격으로 기반 시설이 대부분 파괴돼 식수 부족에 시달리고 가스도 끊겨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주민들은 모든 게 파괴된 도시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 불안에 떨고 있다.
도네츠크주의 러시아 점령지에서 12㎞ 정도 떨어진 도시 슬로우얀스크 주민들의 일상은 5개 밖에 남지 않은 공용 식수 시설에서 물을 확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에이피>(AP) 통신이 8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폭격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가운데 플라스틱 병 등을 자전거나 손수레, 유모차에 싣고 와서 물을 담아 가는 일이 벌써 두달째 이어지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식수 시설들이 얼어서 물조차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도 커지고 있다.
집 근처 공용 물탱크에서 하루에 두번씩 20리터의 물을 구한다는 76살의 여성 류보우 말리는 “폭격 소리가 들리고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려도 물을 구하러 나오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년 전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사는 그는 “아주 위험한 일인줄 알지만, 달리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소연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달 말 이 지역 주민들에게 강제 대피 명령을 내렸지만, 적지 않은 주민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돈이 없고, 갈 곳도 없는 이들이다. 러시아의 침공 전에 인구가 10만명에 이르던 이 도시에 아직 남아 있는 주민은 대략 2만5천명 정도라고 <에이피>는 전했다. 이들은 물을 구할 수 있는 한 이 도시에서 계속 버틸 각오다. 말리는 옮겨갈 곳도 없고 피란에 쓸 돈도 없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가 떠나면 누군가가 우리 집을 차지할테니, 떠나고 싶지 않다. 여기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가 끊긴 우크라이나 동부 슬로우얀스크 주민 류보우 말리가 공용 식수 시설에서 구한 물이 담긴 수레를 끌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슬로우얀스크/AP 연합뉴스
이웃 주민 니넬 키슬로우스카(75)는 모든 물자가 날로 부족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물이 없으면 생존이 안된다. 하루에 60, 80, 100리터씩 물을 구해 와야 하는데,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하다”며 침략자들이 빵과 물을 앗아갔다고 말했다. 니넬은 물을 구하러 나가는 일을 줄이기 위해 목욕을 삼가기도 하고 빨래는 근처에 있는 호수에서 빤다고 전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에서는 여전히 수돗물이 공급된다며 당국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고 <에이피>가 전했다.
크라마토르스크 사정이 슬로우얀스크보다는 낫지만 전쟁이 겨울까지 이어질 경우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올렉산드르 곤차렌코 시 군정 책임자는 가스 공급이 중단된 상황이어서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이 오면 “우물과 물 펌프가 모두 얼어붙을 것”이라며 “도시 전체가 ‘파괴된 기반시설의 인질’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겨울철 동파에 대비하기 위해 보온이 되지 않는 수도관은 운영을 중단할 것이라며 겨울까지 가스 공급이 재개되지 않을 것이 “99%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도네츠크 주민들의 암담한 현실만큼 전쟁 상황도 어둡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가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합병할 경우 대화는 없다고 경고한 이튿날인 8일 자포리자주의 러시아 점령군 정부 대표는 주민투표 시행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인근의 헤르손주에서도 러시아와의 합병을 위한 주민투표를 9월 중 실시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전쟁을 끝낼 평화 협상의 가능성은 점점 줄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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