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이 만연하며 여성·이주 노동자들이 특히 폭력에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국제노동기구의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주 노동자 권리 보호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EPA 연합뉴스
전세계 노동자들 5명 중 1명꼴로 직장 내에서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다는 국제노동기구(ILO) 차원의 첫 실태 조사가 나왔다.
국제노동기구는 5일(현지시각) 영국 자선단체 ‘로이드 레지스터 재단’, 여론조사 기관 갤럽과 함께 세계 121개국의 15살 이상 노동자 12만5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물리적·정신적·성적 폭력과 괴롭힘 중 적어도 한가지 이상을 경험한 이가 전체의 22.8%에 달했다고 밝혔다. 노동기구는 이날 누리집을 통해 공개한 보고서에서 “이번 조사는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 현상임을 보여준다”며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전세계 노동자 7억4300만명이 직장 생활 중 적어도 한번 이상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3개 기관은 지난해 세계 121개국에서 1천명씩의 표본을 대상으로 전화 또는 면접 조사를 벌였으며, 조사 당시 취업 상태가 아니거나 직장 내 폭력에 대해 거론하기 꺼려한 이들을 뺀 7만4364명의 응답 결과를 분석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이런 광범한 직장 내 폭력·괴롭힘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노동기구는 밝혔다.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겪은 폭력은 심리적인 것으로, 응답자의 17.9%가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의 8.5%는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성적 폭력을 겪은 이들은 6.3%였다. 3가지 유형 가운데 성별에 따른 피해 경험 차이가 가장 큰 것은 역시 성적 폭력이었다. 남성은 응답자의 5.0%가 피해 경험이 있는 반면 여성은 8.2%가 피해를 봤다. 여성은 남성보다 심리적 폭력도 더 당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격차는(여성 18.6%, 남성 17.3%) 성적 폭력보다 덜 했다. 물리적 폭력은 남성 중 9.0%, 여성 중 7.7%가 피해 경험자였다.
직장 내 폭력은 한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가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확인됐다. 피해를 겪은 이들 중 31.8%는 2가지 이상의 폭력을 당했고, 3가지 피해를 모두 겪은 이도 전체의 6.3%에 달했다. 보고서는 “한 노동자가 직장 내 폭력을 반복적으로 당하는 일도 흔해, 전체 피해자 5명 중 3명은 직장 생활 기간 중 여러 차례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했다”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들이 직장 내 폭력에 훨씬 취약한 점도 확인됐다. 연령별로는 15~24살 노동자 중의 23.3%가 지난 5년 사이에 폭력을 한차례 이상 당해, 55살 이상자(12.0%)보다 두배나 많았다. 특히, 젊은 여성은 같은 또래 남성보다도 심리적 폭력(21.0% 대 15.5%)과 성적 폭력(8.8% 대 4.0%)에 더 많이 노출됐다. 이주민들도 더 많은 폭력에 시달렸다. 이주 노동자의 22%가 지난 5년 사이 피해를 당해 비이주 노동자(18.9%)보다 더 큰 위험에 처했으며, 특히 여성 이주 노동자 중 피해자는 26.6%에 달했다. 비이주 여성 노동자 중 폭력 피해자는 18.4%였다. 남성의 경우는 이주 노동자(17.9%)보다 비이주 노동자(19.2%) 중에서 폭력 피해자가 더 많았다.
지역별로는 미주 대륙에서 전체 직장 생활 중 폭력과 괴롭힘 피해 경험자(34.3%)가 가장 많았고, 이어 아프리카(25.7%), 유럽·중앙아시아(25.5%), 아시아·태평양(19.2%) 순이었다. 아랍권에 피해자가 가장 적어, 응답자의 13.6%만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소득별로는 통념과 달리 고소득자가 폭력과 괴롭힘을 가장 많이 당해 응답자의 31.9%가 피해를 당했다. 중간소득자와 저소득자는 각각 24.4%와 16.9%가 피해 경험자였다.
마누엘라 토메이 국제노동기구 사무차장은 “사람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이 보고서는 노동 세계에서 폭력과 괴롭힘을 퇴치하기 위해 할 일이 많다는 걸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피해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이들이 전체의 54.4%에 그쳤다고 지적해, 폭력과 괴롭힘 퇴치를 위해서는 공론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걸 확인해줬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