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상황 악화에 분노한 스리랑카 시민들이 지난해 4월 수도 콜롬보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콜롬보/EPA 연합뉴스
토마 피케티 등 세계의 저명 경제학자와 개발 전문가 182명이 경제 위기에 직면한 스리랑카의 부채 탕감 협상을 거대 헤지펀드들이 방해하고 있다며 스리랑카 경제 지원을 위한 협력을 촉구하고 나섰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8일(현지시각)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인도 경제학자 자야티 고시, 그리스의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재무장관 등 182명이 이런 내용의 성명서를 자사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스리랑카 부채 (탕감) 협상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며 투자 기업과 헤지펀드 등 민간 부문 채권자들이 협상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스리랑카가 경제 회복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광범한 부채 탕감이 필요하다”며 “스리랑카 사태는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전세계적인 부채 위기를 막기 위한 국제 사회의 의지를 시험하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스리랑카는 20년 가까운 족벌 정치와 오랜 내전으로 경제가 취약한 상황에서 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까지 겹치면서 지난해 510억달러(약 63조8천억원)의 외채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를 맞았다. 경제가 파탄 나면서 국민들이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나서자, 지난해 7월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이 군용기를 타고 국외로 도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제 민간 금융계는 스리랑카의 외채 가운데 40%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데, 최근 국제 금리가 치솟으면서 이들이 거둬들이는 이자 수입은 이 나라가 외국에 지불하는 전체 이자의 50%에 달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학자와 전문가들은 성명에서 “이런 (민간) 채권자들은 자신들의 투자 위험을 피하기 위해 높은 할증 금리를 적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며, 이는 2022년 4월 스리랑카가 사상 처음으로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게 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위험 회피용 할증 금리로 이득을 얻은 채권자들은 그 위험의 결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스리랑카의 외채가 장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판단이 설 경우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인데, 민간 채권자들이 협상에서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경우 스리랑카로서는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영국에 본부를 둔 개도국 지원 단체 ‘부채 정의’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여러 개도국이 외채 위기에 직면했다며, 스리랑카 외에 레바논, 수리남, 우크라이나, 잠비아에 이어 최근엔 가나까지 외채 채무불이행 사태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전세계적으로 금리가 계속 오르고 올해는 경제 침체도 예상되면서 채무불이행 사태에 빠지는 나라가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피케티 등의 학자들은 “스리랑카 사태는 세계가 날로 시급해지는 (개도국) 부채 탕감과 지속 가능성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며 “이 문제는 스리랑카 국민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당성과 실행 능력 결여로 이미 비판을 받고 있는 국제 다자 체제에 대한 신뢰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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