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사우디 외무장관(왼쪽) 등 정부 대표단이 프랑스와 사우디의 정상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 엘리제궁에 들어서고 있다. AFP 연합뉴스
최근 미국의 중재로 중동의 숙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국교 정상화가 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사우디의 교과서에 이스라엘을 적대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조사가 나왔다.
19일 <시엔엔>(CNN)은 이스라엘과 영국에 본부를 둔 비영리 단체 ‘학교교육의 평화 및 문화적 관용 모니터링 연구소’(IMPACT-se)가 5월 발표한 보고서 ‘사우디 교과서 최신 리뷰(2022~23년)’를 인용해 이처럼 보도했다. 보고서는 지난 몇 년간 사우디 교과서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대부분 삭제되거나 완화됐다고 설명했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사우디를 모니터링해온 이 단체는 2022~2023년 사우디 교육과정의 교과서 80여종과 이전 교육과정의 교과서 180여 종을 비교해 변경 사항을 종합해 보고서를 냈다.
구체적으로 사우디 교과서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이슬람의 적”이란 구절이 사라졌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정착을 반대한다”는 구절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전 교과서에서는 학생들에게 “아랍 땅 팔레스타인에서의 권리에 대한 시오니스트(유대인 민족주의자)의 주장 중 하나를 반박하라”는 문항이 있었지만 2022년 교과서에서는 삭제됐다. 또한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적군 시오니스트”란 구절이 “이스라엘 점령군”이란 표현으로 대체됐다. “적군 이스라엘” 대신 “이스라엘 점령군”으로 바뀐 교과서도 있었다. 또한 2022~2023년에 첫 도입된 고교 교과서에서 팔레스타인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챕터가 삭제됐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한 적대적 표현이 줄고 평화와 관용을 강조하는 내용이 증가했다고 단체는 밝혔다.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가 그동안 적대해온 이슬람 시아파·유대교·기독교를 비하하는 종교적 표현이 상당부문 완화됐다고 단체는 설명했다. 반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헤즈볼라·이슬람국가(ISIS)·알카에다·후티 민병대는 테러와 극단적 사상을 조장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기존보다 더 많이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에든버러대 걸프 지역 연구원 미라 알 후세인은 <시엔엔>에 “이는 새 걸프국 지도부가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세속적(비종교적)이라는 것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갑자기 관용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야심찬 일”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아랍걸프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크리스틴 디완은 <시엔엔>에 “최근의 변화는 사우디의 새로운 정치 방향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의 발상지인 성지 두 곳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아왔지만, 최근 몇 년 간은 세속적 형태의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다만, 디완은 “이러한 언어의 변화가 사우디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수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사우디와 이스라엘 국교 정상화 움직임은 최근 몇 년 간 진행돼왔다. 특히 미국은 2020년 이스라엘이 아랍 4개국과 체결한 ‘아브라함 협정’을 기반으로 사우디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촉구했다. 하지만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관계 진전의 조건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어 난항이 계속되고 있다.
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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