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시와 밀약 등 의문 풀릴까 관심…블레어는 내년초 증인출석 예정
최근 유럽연합 상임의장 경쟁에서 탈락한 ‘쓰라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적극 동조해 ‘부시의 푸들’이란 오명까지 얻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청문회에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2일 영국의 군 수뇌부가 작성했던 비밀문서가 폭로되면서 영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비밀문서는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1년여 전부터 군사작전을 준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이라면 블레어 당시 총리는 의회에서 거짓말을 한 셈이다. 2002년 6월 블레어는 의회에서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결정된 것은 없으며 침공을 준비하고 있지도 않다”고 답변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지난 6월 정보부 고위직 출신의 존 칠콧 단장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한 이라크전 진상조사단은 24일 이라크전 전사자들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수개월간 지속될 역사적인 청문회에 돌입했다. ‘국가 안보에 관련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공개된다. 영국의 이라크 침공 결정 과정과 정당성 및 합법성 여부를 밝히는 것이 핵심 임무인 이번 청문회는 “이라크전에 개입했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조사”(<에이피> 통신)가 될 전망이다. 군의 비밀문서들은 이번주 중으로 브라운 총리가 주재하는 진상조사단 회의에도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
의문 가운데 하나는 바그다드 공습을 2주 앞둔 2003년 3월7일부터 17일까지 열흘 동안 블레어 정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 직전까지 공습에 반대하던 블레어의 측근들이 대거 태도를 바꾼 시기다.
블레어는 극소수 측근 참모들만으로 구성돼 ‘소파 정부’란 별칭이 붙은 비밀그룹 회의에서 이라크전 참전을 결정했다. 총리실이 이라크 침공의 정치적 결정을 내렸고 정보기관들은 이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됐다는 의혹도 이미 제기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넷판은 23일 청문회에서 밝혀져야 할 핵심적인 의문 다섯 가지를 꼽았다. △블레어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이라크전 참전과 관련해 어떤 약속을 했는가 △블레어는 피터 골드스미스 당시 검찰총장과 잭 스트로 당시 외무장관 등으로부터 이라크 정권 교체가 침공을 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경고를 받았는가 △영국 정보당국들이 왜 침공 결정에 개입됐는가 △당시 정부가 정치·외교적 이유로 군사적 준비를 유보했는가 △침공 이후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등이다. 또 어떤 인물들이 청문회 증인으로 나올지, 어떤 논쟁이 벌어질지, 면책권이 주어질지 등도 관심거리다. 이라크전에서 숨진 군인들의 유족은 블레어에게 직접 질문할 기회를 요구하고 있는데, <인디펜던트>는 블레어에 대한 조사는 내년 초께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브라운 총리에 대한 조사도 이뤄질 전망이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가 꾸린 조사단이 독립적으로 진상조사 활동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칠콧 단장은 “잘못을 감추는 조사 결과를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청문회는 판결을 내리는 장이 아니라 “미래에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과 충고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태도다. 영국은 지난 6년간 이라크 전쟁에서 179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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