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점투성이 행동지침
400만㎾ 예비전력은 ‘허수’…실제론 절반 정도
전력거래소 매뉴얼보다 ‘앞당긴 조처’ 원인돼
400만㎾ 예비전력은 ‘허수’…실제론 절반 정도
전력거래소 매뉴얼보다 ‘앞당긴 조처’ 원인돼
‘매뉴얼의 실패다.’ 지난 15일 사상 초유의 전국적인 정전사태가 벌어진 데는 전력 비상사태에 대비해 마련해둔 매뉴얼(행동지침)의 허점이 크게 작용했다. 매뉴얼만 잘 만들었어도 이런 파국적 결과는 피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태의 장본인인 전력거래소와 지식경제부 등 전력당국은 16일 뒤늦게 “(매뉴얼을) 손보겠다”며 나서고 있다.
전력당국은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사용할 수 있지만 쓰지 않고 남겨둔 예비전력을 항상 400만㎾ 이상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매뉴얼도 전력량에 맞춘 조처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았다. 하지만 이 매뉴얼에 규정된 예비전력 수치 안에 허수가 들어 있다. 10시간 뒤에나 발전이 가능한 발전소가 예비전력 안에 포함되는 등 규정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이다. 이번에도 규정대로라면 20분 안에 전력을 생산해야 할 발전소 3곳이 실제로 전력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예비전력이 400만㎾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200만㎾ 안팎인 경우가 가능한 것이다. 이종훈 발전노조 정책실장은 “통상 발표된 것의 절반 정도를 실제 예비전력으로 본다”며 “예비전력의 허수를 걷어냈다면 이번 사태가 좀 다르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비전력 안에 허수가 들어 있다 보니, 전력거래소는 매뉴얼보다 더 앞서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력당국으로선 적절한 조처를 취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면 과잉조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사태에서 ‘과잉조처냐 선제조처냐’ 하는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더 나아가 매뉴얼을 현실에 맞춰 정교하게 짜놓았다면 이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예비전력의 거품이 빠진 상황에서 실제 전력량에 맞춰 차근차근 조처를 했다면 정확한 선제적 조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들에 대한 사전통지 규정도 매뉴얼에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주요 시설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지하도록 규정해 놓았지만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단전할 때는 이를 알리도록 하는 의무조항이 아예 없다. 매뉴얼에는 일반주택이나 저층아파트 등의 경우 아무 예고 없이 단전 조처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이번처럼 순환정전이 이뤄지면 막대한 국민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매뉴얼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발전소 정비 일정이 최근의 기후변화를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된다. 최근 3~4년 동안 이상기온으로 폭염과 폭설 등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예전 기준에 따라 발전소 정비 일정을 마련해놓고 별다른 생각 없이 이를 시행해온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늦더위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음에도 성급하게 몇몇 발전소 가동을 중단하고 정비에 들어간 것이 결국 화근이 됐다. 이상기온에 맞춰 비상시 대비 시나리오를 다시 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전력거래소는 14일과 15일 전기공급을 100만~170만㎾ 줄이는 것으로 계획을 짜 혼란을 키웠다.
매뉴얼은 정확히는 전력거래소의 운영 전반에 대한 규정을 담은 ‘전력시장 운영규칙’을 일컫는다. 전력거래소가 만들어 지식경제부 장관의 승인을 받는데,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해 전문가 위원 등 총 10명이 참여해 해마다 수정한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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