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극과극’ 오간 생애
가난한 유목민 집안 출신 무혈쿠데타로 왕정 몰아내
한때 반제운동 영웅 평가…민중봉기 8개월만에 “최후”
가난한 유목민 집안 출신 무혈쿠데타로 왕정 몰아내
한때 반제운동 영웅 평가…민중봉기 8개월만에 “최후”
한때 원대한 이상을 품고 서구 강대국들에 맞섰던 풍운아였다. 제3세계의 반제 비동맹 운동의 영웅으로서 환호와 기대도 받았었다. 그런 그도 아랍권의 거센 민주화 시위의 격랑에 맞서다 끝내 비참한 최후를 자초했다.
리비아 전 국가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69)가 20일 자신의 고향이자 마지막 저항 거점인 시르트에서 시민군에 체포됐으며, 과도 정부는 그의 사망을 발표했다. 이로써 42년이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해온 카다피는 ‘아랍의 봄’ 이후 튀니지의 자인 엘아비딘 벤알리(74)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82)에 이어 세번째로 ‘몰락한 독재자’로 기록됐다.
카다피는 1969년 9월 27살의 대위 시절에 무혈쿠데타로 왕정을 몰아내고 집권했다. ‘리비아 9월 혁명’이다. 그의 공식 직함은 집권 이래 줄곧 ‘혁명 지도자 겸 수호자’였다. 혁명평의회 의장과 리비아 인민총회 서기장이란 칭호는 집권 10년이 되던 1979년에 떼어냈다.
1942년 가난한 유목민 집안에서 난 카다피는 10대 때부터 이집트 혁명을 주도한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념에 몰입했다. 서구 식민지주의를 거부한 범아랍 민족주의다. 군인의 길을 선택한 그는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그리스와 영국의 군사대학에서 연수했다. 그의 쿠데타 혁명은 이집트 혁명이 원형이었다. 1972년에는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세 나라가 범아랍국가 창설의 전단계인 ‘아랍공화국연방’을 선포했으나 국가통합에는 실패했다.
카다피의 정치철학은 그가 33살때 쓴 <그린 북>(녹서)에 잘 정리돼 있다. 겉표지가 리비아의 국기처럼 온통 녹색인 이 책은 제1권 ‘민주주의 문제의 해법: 민중의 권위’, 제2권 ‘경제 문제 해법: 사회주의’, 제3권 ‘제3의 국제이론의 기초’ 등 세 권으로 짜였다. 카다피는 특히 정치체제론에서 대의제에 바탕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대신 인민위원회에 기초한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런 사상은 카다피가 1977년 개정 선포한 ‘대(大)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인민 사회주의국’(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라는 복잡한 국호에도 반영돼 있다. ‘자마히리야’는 카다피가 녹서에서 처음 선뵌 아랍어 조어로, ‘민중국가’ 정도로 번역된다. 코란의 율법이 헌법을 대신하고 기초인민회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전체인민회의가 내각을 임명한다. 이런 독특한 국가체제는 카다피가 독재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억압의 수단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집권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해 아랍 민족운동과 무장투쟁을 적극 후원하고 반미·친소 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와 압박이 뒤따랐다. 특히 1980년대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으부터 ‘중동의 미친 개’라는 욕설을 들을만큼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러나 30여년에 걸친 경제적 압박과 외교적 고립 끝에, 카다피는 2003년 팬암기 폭파사건(1988년) 배상과 핵개발 포기를 대가로 미국과의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6년에는 미국·영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경제제재도 풀리면서, 적극적인 외자 유치와 원유 수출로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방에 대한 카다피의 날선 태도는 변치 않았고, 경제성장을 밑천 삼아 독재체제도 더욱 강화했다.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는 권력세습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영속할 것만 같았던 무소불위의 권력도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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