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섭 국제부 기자
[한겨레 프리즘] 독도 인 더 헤이그
1946년 10월22일 영국 해군 함정 4척이 그리스 북부의 작은 공산국가 알바니아의 영해를 침범했다. 이 함선들은 알바니아가 영국 군함의 무해통항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은 참이었다. 무해통항은 외국 선박의 항해가 연안국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국제법상의 권리다. 이미 그해 초 알바니아군이 영국 군함에 영해 침범을 이유로 대포 사격을 한 적이 있었던 터라 영국 배들은 알바니아가 공격할 경우 즉각 대응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말이 좋아 무해통항이지 의도적인 군사적 도발인 셈이었다.
냉전 초기의 흔한 해프닝 중 하나가 될 뻔했던 이 사건은 오후 3시께 구축함 소머레즈가 기뢰에 피격되면서 대형 사건으로 번졌다. 오후 4시16분에는 소머레즈를 구출해 끌고 가려던 또다른 구축함 볼라지마저 기뢰에 당했다. 다행히 두 척 모두 침몰하지 않고 12시간의 사투 끝에 코르푸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44명이 죽고 42명이 다친 뒤였다.
이것이 바로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창설 이후 맡은 첫 사건인 ‘코르푸 해협 사건’이다. 영국은 곧바로 이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했고 유엔은 두 나라에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라고 권고했다. 영국은 이 사건을 서둘러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지만, 알바니아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하지만 사건은 약소국인 알바니아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당시 유엔 가입에 목을 매던 알바니아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를 따르겠다고 한마디 했다가 곧바로 재판 참여 의사가 있는 것으로 확정돼 버렸다. 재판은 알바니아 쪽이 한번도 참석하지 않은 채로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재판부는 1949년 12월15일 알바니아에 영국에 84만3947파운드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며 영국의 손을 들어줬다.
60년도 지난 이 사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똑같은 상황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 우리나라에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알바니아는 애초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에 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결국 국제사회의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만약 일본과의 대결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 군사적 대치로까지 이어질 경우 국제사회가 독도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종용하지 말란 법이 없다. 재임기간 내내 다른 무엇보다 국격, 다시 말하면 다른 나라의 인정을 중요시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이 뜬금없이 독도를 방문하고 뒤이어 일왕에게 사과 운운한 순간부터 독도는 극도의 분쟁을 겪고 있는 지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소비세 인상 등으로 국내에서 최악의 인기를 기록하던 일본 정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호재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공세는 점점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으로서는 쓸 만한 카드가 거의 없다.
현재 정부의 대처를 보면 불안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일본 국민의 감정을 건드린 일왕 관련 발언만 해도 그렇다. 청와대는 의도된 발언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는 모양인데, 차라리 의도된 발언이었다면 그나마 걱정이 덜할 판이다.
현재 외교통상부에서 독도법률자문관으로 일하고 있는 정재민 판사가 쓴 소설 제목은 <독도 인 더 헤이그>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로 독도 재판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 법정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가정해 쓴 소설이다. 일본은 그동안 꾸준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역사적·법적 증거를 모아왔을 것이다. 현직 1명을 포함해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 3명을 배출했던 만큼 국제재판에 대한 준비도 철저할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는 최후의 순간에 대한 준비가 돼 있는가.
이형섭 국제부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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