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신부 2명 군사정권 조사에 외면 의혹
“사제들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장했지만 논란
“사제들 구하기 위해 애썼다” 주장했지만 논란
13일(현지시각)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호르헤 마리로 베르골리오)에 대해서는 “교리 해석에는 온건 보수적이지만 빈곤과 질병 등 사회 문제에는 진보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톨릭 교회가 2000년 만에 맞는 비유럽 출신 교황이라는 점도 그가 가진 유용한 자산이다.
교황은 소탈한 그의 성격을 반영하듯 14일 성마리아대성당을 방문해 성모께 기도를 올렸고, 돌아가는 길에도 자신의 전용차 대신 다른 추기경들이 탑승한 버스에 동행했다. 콘클라베에 들어가기 전에 묵었던 호텔에 들러 숙박료를 직접 계산하는 것은 물론, 그를 선출한 추기경들에게 “나를 뽑은 당신들이 신께 용서받았으면 한다”는 농담도 걸었다.
그러나 교황도 1970년대 군부 독재로 얼룩졌던 남미 현대사의 그늘을 피해가진 못했다. 영국 <가디언>은 14일 ‘아르헨티나 독재 시기 그의 역할에 대해 남은 의문’이라는 기사를 통해 교황이 ‘더러운 전쟁’(1976~1983) 시기에 군사정권의 독재에 침묵함으로써 그가 수장으로 있던 예수회 신부 2명이 군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도록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호르헤 마리로 베르골리오 주교는 1973~1979년 당시 예수회의 총장이자,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였다.
그에 대한 가장 큰 혐의는 그가 두 명의 예수회 사제인 오를란드 요리오와 프란시스코 하릭스의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인물은 언론인 오라시오 베르빗스키다. 그는 당시 교회의 실상을 다룬 책 <침묵>에서 베르골리오가 두 명의 사제에 대한 보호령을 철회해 이들이 결국 군에 끌려가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976년 5월 해군 장교에 의해 연행돼 그들이 빈민가에서 진행했던 빈민 사목에 대해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조사를 받았다. <가디언>은 “이는 당시 정치적인 환경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고 전했다. 이 주장은 그가 당시 조사를 받았던 하릭스와 나눈 대화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베르골리오는 이 의혹을 중상 모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두 신부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애썼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에 대한 증거는 분명치 않다. 당시의 관련 문서들은 대부분 파괴됐고,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은 세상을 떠났다. 도덕적인 논란은 분명하지만, 당시 삶을 살아갔던 많은 이들은 ‘회색’의 위치를 강요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베르골리오가 ‘더러운 전쟁’ 시기에 상처받은 이들을 치료하고 교회가 입은 신뢰의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지난 2월 두 명의 사제를 살해한 혐의로 3명의 전직 군인들을 무기징역에 처하면서 아르헨티나 법원은 “당시 교회가 진보적인 신부들을 죽이는 일에 눈을 감았다”고 엄중히 추궁했다. 이 재판에서 법원은 베르골리오에게 증인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2010년 결국 법정에 나왔는데, 상대측 변호인들로부터 “얼버무리고 있다”고 공격 받았다.
영국 <가디언>은 그러나 이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과거 청산을 위한 여러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카톨릭 교회는 지난 2000년 “우리는 신 앞에서 우리가 잘못한 일에 대해 고백하고 싶다”며 지난 세기 그들이 저지른 침묵에 대해 사죄했다. 그러나 폭력에 맞서 할말을 했고, 그로 인해 사라져간 신부와 주교들도 많았다. 새 교황은 어느 쪽이었을까. 그가 알고, 신이 아는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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