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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물대포도 두렵지 않다…춤추고 폭죽쏘며 발랄한 저항

등록 2013-06-13 20:04수정 2013-06-13 21:11

공공장소 희잡 허용·입맞춤은 금지
전근대적 이슬람주의 추진 뿔났다
젊은 여성·축구 서포터스 손잡고
농담과 춤·노래·폭죽으로 맞선다

한국 촛불시위처럼 축제같은 저항
문제는 정치적 출구 안보인다는 것
선거는 멀고 야당은 믿음 잃어
그래도 시민불복종사 새장 열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12일 “그동안 공격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이번 시위는 24시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수천여명의 시민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탁심광장에 모여들고 있다. 당국의 전면 진압이 시작될지, 반정부 시위가 더 격화될지는 “이번 주말이 최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외신들은 예상하고 있다. 도대체 이 시위는 어디에서 비롯해 어디로 가는 것일까.

■ 전근대, 현대, 탈현대가 섞이다

최근 위키피디아에 신조어 ‘차풀링(chapuling 또는 capuling)’이 등록됐다. ‘평화롭고도 웃기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행동’을 뜻한다고 위키피디아는 설명한다.

신조어 저작권의 일부는 에르도안 총리에게 있다. 지난 2일 그는 반정부 시위대를 맹공했다. “‘차풀주’(chapulcu)를 방관할 수 없다. (게지공원 재개발에 대한) 그들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2011년 총선에서) 국민 50%의 지지를 받았다.” 터키어 ‘차풀주’는 약탈자를 뜻한다.

터키 시민들은 총리의 발언을 비틀었다. 트위터·페이스북 등을 통해 “나도 차풀주다”라고 밝히는 연대·지지 활동이 이어졌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도 동참했는데, 그만 터키어를 잘못 사용했다. “탁심은 모든 곳에 있고, 저항도 모든 곳에 있다. 나도 차풀러(chapuller)다.” 이로부터 터키 시민들은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뜻의 동사 ‘차풀(chapul)’을 만들어내고, 그 명사형인 ‘차풀링’을 탄생시켰다.

반정부 시위의 진앙지, 이스탄불의 탁심광장에는 경찰 불도저 부속품을 뜯어 만든 ‘차풀 나무’가 생겼다. “나는 매일 차풀한다”고 적힌 흰색 티셔츠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꼭 사고싶은 물건)으로 떠올라 7.5터키리라(약 4500원)에 팔리고 있다.

차풀 티셔츠를 입은 차풀러들은 ‘차풀 텐트’(개인 천막)에서 인터넷 방송 ‘차풀 티브이(TV)’를 보다가 콘크리트 벽에 마련된 ‘차풀 아트 갤러리’에 이런 문장을 낙서한다. “나한테 경찰질을 해봐(cop me). 최루가스를 뿌려봐. 내가 차풀을 느낄 때까지.” 그리고 하루 종일 경찰과 맞선다.

이 최신어에 대해 위키피디아는 “터키어와 영어를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잡종·혼융) 단어”라고 주석을 달았다.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터키 반정부 시위 자체가 하이브리드다. 이들의 시위에는 전근대와 현대, 그리고 탈현대가 뒤섞여 있다.

시위대가 반대하는 것은 전근대 이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화해왔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히잡(이슬람 두건) 착용을 허용했다. 공공장소에서 입맞춤을 비롯한 남녀 신체 접촉을 막고, 사실상 모든 술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에르도안 총리가 ‘술탄’(옛 오스만제국의 황제)을 되살리려 한다”고 야당인 공화인민당은 비판하고 있다.

시위 진압 방식은 20세기적 현대의 전형이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와 연발 최루탄을 쏘고, 불도저로 바리케이드를 치워버린다. 기계문명이 탄생시킨 투명방패와 은색 헬멧의 전투경찰은 1980·90년대의 한국과도 닮았다.

이에 맞선 저항은 탈현대적이다. “이번 시위를 이끄는 지도자는 없다. 지도부도 분명하지 않다”고 영국 방송 <비비시>(BBC)가 평가했다. 정당·노동조합 등은 그저 조력자다. 탈중심·탈권위의 시위를 이끄는 이들은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젊은 여성, 중산층 남성, 축구 서포터스, 가난한 청년층”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분석했다. 특히 마초의 대표격인 축구 서포터스와 붉은 드레스를 입은 페미니스트가 함께 시위를 이끌고 있는 것은 가히 ‘젠더 연대’라고 부를만하다.

이들이 채택한 ‘싸움의 기술’은 ‘웹 2.0’ 방식이다. 정부 검열 아래 숨죽인 기성 언론에 대한 기대를 접고 트위터·페이스북·유튜브 등으로 사실·의견을 실시간 공유하며 네트워크형 연대를 맺었다. 의제·구호·조직에 이르기까지 시위의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해결한다.

그들의 무기는 풍자, 은유, 농담이다. 터키 방송이 반정부 시위 뉴스 대신 펭귄 다큐멘터리를 내보내자, 시위대는 즉각 “나도 펭귄이다”라는 트위트를 줄줄이 올렸다. 경찰의 물대포 차량 매매 광고도 페이스북 등에 나붙었다. “이틀 전 존경하는 정부로부터 빼앗은 물대포를 팝니다.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에 1000명의 경찰에게 물을 뿌릴 수 있어요. 보너스 - 경찰제복과 최루탄 총이 물대포 안에 있습니다.”

<가디언>은 “매일 밤마다 게지공원은 캔맥주를 손에 들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콘서트장이 된다”고 전했다. 정치적 저항을 언어·문화 놀이로 승화시키고 있는 이들은 최근 새로운 아이콘(상징)을 만들어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쏠 때마다 시위대는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그것은 무력하지만 화려한 저항이다. 공권력의 코앞에서 축제의 빛으로 밤하늘을 물들인다.

■ 출구 못찾는 광장의 저항

그 양상은 2008년 한국 촛불시위의 데자뷰(과거에 봤던 것을 다시 봄)다. 게지공원을 쇼핑몰로 재개발하겠다는 터키 정부의 발표가 이번 시위를 불렀다. 2008년 한국에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반 엠비(MB) 시위로 번졌다. 정부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곧바로 반정부 시위로 격화된 것이다. 여성·청년 등 ‘정치적 주변인’들이 시위를 주도하며, 인터넷·모바일 등으로 소통·조직하는 점도 닮았다.

가장 큰 공통점은 ‘정치적 대안’의 부재다. 광장의 에너지를 의회로 밀어올리려 해도 당면한 선거가 없다. 내년 3월 지방선거가 있지만 너무 멀다. 총선은 2015년 6월에야 치러진다. 수십만명이 몇달 동안 운집했어도 정권 심판 투표를 할 수 없었던 2008년 한국 촛불 시민의 처지와 비슷하다.

야당도 허약하다. 세속주의 정치를 표방하는 공화인민당은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투르크가 창당했다. 오랫동안 집권했지만 1980년대 이후 정치력을 잃었다.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50%의 지지를 얻은 2011년 총선에서 공화인민당은 26% 득표에 그쳤다.

그 몰락은 1960~9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공화인민당은 터키의 현대화·자본주의화를 이끌었지만, 연립정권이 이슬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릴 때마다 군부가 개입해 조정했다. 세속주의를 지키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었다. 뒤이어 1990년대의 경제 위기에다 1999년 1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 피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자 민심이 공화인민당을 떠났다.

최근 이스탄불 빌기대학의 에스라 빌기치 교수가 시위 참여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가 ‘어떤 정당과도 가깝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반정부 세력조차 제1야당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터키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은 ‘경제발전’이었다. ‘세속주의건 이슬람주의건 경제부터 회복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에르도안의 장기집권을 낳았다. 공화인민당의 무능에 지친 유권자들은 2002년 총선에서 갓 창당한 정의개발당에 34.2%의 지지를 보냈다. 지지율은 계속 높아졌다. 정의개발당은 2007년 총선에서 46.5%, 2011년 총선에서 49.9%의 지지를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에르도안 총리는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 발전에 편승한 이슬람주의

경제발전은 이슬람주의 복권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2002년 첫 집권 때만 해도 에르도안 총리는 서방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행하며 유럽연합(EU)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서구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지도자’라며 에르도안 총리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에르도안 총리의 내면에는 이슬람주의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정치 초년 시절, 이슬람주의 정치 집회에 참가했다가 실형을 살았다. 2002년 총선 직후, 총리에 오른 것은 2인자인 압둘라 굴이었다. 집권 이후 사법부의 사면 조처가 내려진 뒤에야 에르도안은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잠자고 있던 이슬람주의 불꽃에 섶을 던진 것은 유럽연합이었다. 키프로스 섬을 두고 분쟁을 벌여온 그리스와 인권·민주주의를 문제삼은 프랑스 등이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 심사는 2015년에야 종료될 예정이지만, 터키가 이를 통과할지는 불투명하다.

경제성장이 절실했던 에르도안 총리는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2001~2008년 사이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터키의 수출액은 7배나 증가했다.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필두로 각종 상품은 물론 드라마까지 중동에 수출하고 있다. <가디언>은 “경제적 측면에서 터키는 이미 서구의 궤도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영토로 돌진하고 있다”고 평했다.

유럽이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하는 동안,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터키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서구 민주주의 기준에 맞춰야 할 절박함이 사라지고 있다. 장기집권에 양탄자를 깔아준 2011년 총선 승리 이후, 에르도안 총리는 “국가는 세속주의적일 수 있지만 개인은 그럴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해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는 자신을 “세속주의 국가의 무슬림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부패 혐의로 3명의 장성을 비롯해 300여명의 장교를 투옥시킨 일은 중동으로 향하는 그의 야심에 엔진을 달아주었다. 195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키며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을 견제한 군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이다.

정치적 주기로 보자면, 현재 터키는 1920~40년대 세속주의 정치, 1950~80년대 군부 영향기, 1990년대의 정치·경제적 혼란기를 거쳐 이슬람주의 정치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서구 언론들은 “이번 시위로 에르도안에 대한 중산층의 지지가 하락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경제발전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기대는 유럽의 자유주의와 중동의 이슬람주의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다.

지난 10여일 동안 터키의 78개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로 적어도 5000여명이 다쳤고, 4명이 숨졌다. 이번 시위에 따른 정책 변화는 없다. 정부는 게지공원 재개발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총리 퇴진은 물론 경찰청장 해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위대의 미래에 대해 <가디언>은 2011년 러시아의 반정부 시위를 비교했다. 푸틴의 장기집권에 지친 러시아 시민들이 광범위한 반정부 시위에 나섰지만, 결국 경찰력에 의해 진압됐다. 선거에서 심판할 것을 다짐했지만, 2012년 푸틴은 다시 집권했다.

“시민의 불복종과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고 더 강하고 좋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세계적 정치학자 에이프릴 카터는 평가했다. 터키 반정부 시위는 한국의 2008년 촛불시위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적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이 터키인들에게 위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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