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된 워터게이트 사건 후인 1975년, 미 상원은 ‘처치위원회’를 열어 국가기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았다. 그 기준은 ‘시민의 권리 보장’이었다. 위키리크스 갈무리
[토요판] 커버스토리
1970년대 미국 ‘처치위원회’
1970년대 미국 ‘처치위원회’
아인슈타인까지 사찰한 FBI
남베트남 쿠데타 기획한 CIA
닉슨이 사임한 뒤 조직된
미 상원 ‘처치위원회’는
이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과
시민권리 침해 사례들을 조사 CIA도 국내 사찰활동 벌였다
반전운동가 미행하며 도청하고
언론에 비난기사를 싣게 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하고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를 통해
시민들 결혼생활까지 깼다 1970년대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냉전정책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생겨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닥쳐온 군수산업의 위기를 ‘새로운 적’을 만들어 대응해 나간 미국의 냉전정치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했던 미국 시민들의 반발을 국가안보의 명분으로 억누른다. 미국 하원의 ‘비미국인 활동 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조사 대상이 된 사람들은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이른바 ‘안보국가’(Security State)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중앙정보국(CIA)에 의한 외국 지도자 암살, 쿠데타 기획과 지휘, 연방수사국(FBI)에 의한 국내 정치 개입, 언론인과 인권운동 지도자 등에 대한 수십년간의 비밀사찰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국가기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아 나간 것이 상원 ‘처치 위원회’(Church Committee)였다. 아이다호 출신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 위원장의 이름을 따 1975년에 출범한 이 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정보활동에 관한 정부의 운영정책 검토 소위원회’였다. 그들은 알고보니 불법조직이었다 이에 앞서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절정에 이른 1971년, 연방수사국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시민운동 단체에 의해 최초로 폭로된다.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해서 심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비밀 사찰한 연방수사국의 방첩프로그램 코인텔프로(COINTELPRO: Counter Intelligence Program)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중대한 문건이 공개된다. 국무부에서 베트남전쟁 종결 과정에 관여했던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대니얼 엘즈버그가 베트남 비밀개입 전략이 상세하게 기록된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폭로한 것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작성을 지시한 이 문서에는 중앙정보국이 베트남 정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쿠데타를 진행시켰으며, 어떤 암살행위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는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아직 진상의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1971년 8월에는 1944년 이래 브레턴우즈 체제의 약속에 따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교환해주던 금 태환 시스템이 붕괴된다. 그 이듬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은 또 하나의 시대적 격변을 예고한다. <펜타곤 페이퍼>, 코인텔프로, 베트남 반전 운동 등은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고, 당연히 닉슨은 자신감을 갖는다. 그는 재선 준비팀을 가동하다가 결국 무리수를 쓰고 만다. 1972년 6월 전 중앙정보국 요원이 투입된 민주당 선거사무실 난입이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내세운 지 겨우 4개월 만이었다. 1974년 닉슨은 불명예 퇴진을 하고 정부 권력기관에 대한 처치위원회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중앙정보국, 연방수사국, 그리고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 등은 이 과정에서 의회의 감독과 관리 대상이 되었다. 처치위원회는 “이 위원회 설립 결의의 가장 중대한 강조점은 미 정부기관의 정보활동이 ‘미국 시민들의 권리’를 위협했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위원회는 국가안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정보기관에 대한 강력한 통제 수단이 강구되지 않으면 “민주사회가 위협받고 미국 사회의 본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세 가지 유형의 활동을 그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첫째는 프락치 잠입, 도청, 편지 뜯어보기 등의 비밀 사찰활동, 둘째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대중적으로 확산해서 목표가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공공의 적처럼 만들어버리는 행위, 셋째는 목표가 되는 개인과 단체를 파괴하거나 사회적으로 추방당하게 하는 비밀활동 등. 이러한 활동을 조사하면서 처치위원회가 집중한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 정부의 어떤 기관이 민간인 사찰에 관여했는가? 2. 얼마나 많은 수의 시민들이 정보기관의 사찰 목표가 되었는가? 3. 정보기관의 사찰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4. 단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는가? 5. 목표가 된 시민들의 사적 생활과 관련된 정보도 수집되어서 그 개인의 삶을 훼손하는 데 이용된 적이 있는가? 6. 정보기관이 사찰 대상이 된 단체나 개인의 신뢰를 파손하고 그 조직이나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활동을 한 바 있는가? 7. 상부기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였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행위였는가? 8. 정보기관은 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9. 정부와 의회는 정보기관을 통제하고 책임을 묻는 조처를 얼마나 취해왔는가? 10. 전체적으로 봐서, 삼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정보기관 통제에 제대로 작동했는가?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것은, 이들 정보기관이 미국 헌법의 기본조항들을 모조리 위반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알고 보니 불법조직이었다. 국내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중앙정보국도 카오스(CHAOS)라는 이름의 국내 사찰활동을 벌였다. 이들 정보기관들은 마피아를 동원해서 피델 카스트로 제거 계획을 세우거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모르게 심리통제 약물 시험을 하는가 하면, 반전 운동가들에게 도청 등 대대적인 비밀사찰을 하고 언론에 이들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싣게 해서 이들의 대중적 영향력과 신뢰를 훼손한 것은 기본이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만들거나 결혼생활까지 파괴하는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 등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유린하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은 처치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명령 11905를 통해 대외정보기관에 대한 의회의 감독을 강화하고, 암살을 비롯해 제3국에 대한 비밀개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으며, 1978년 지미 카터는 대통령 명령 12036을 통해 더욱 강화된 정보기관 감독 법률을 시행했다. 레이건·부시 정권 때 뒤집어져 그러나 1981년 레이건은 대통령 명령 12333으로, 처치위원회의 결정을 완전히 뒤바꿔 정보기관의 기능을 확대강화하고 중앙정보국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미 연방정부기관은 정보 제공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네오콘(강경 보수파)의 태동이었다. 20년 뒤 이들 네오콘이 권력을 쥐는 부시 때는 대통령 명령 13470을 바탕으로 정보기관의 기능을 최강으로 확대하는 역전이 일어났다. 처치위원회의 노력이 무산되는 순간이자 미국 민주주의 위기가 재론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2008년 처치위원회의 보고서가 이런 상황에서 재출간된다. 역사적인 문서가 현실적으로 의미심장한 책자가 된 것이다. 결국 의회의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 언론의 비판기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각성된 의식과 문제제기가 있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관의 민주주의 유린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국가안보 논리는 꾸준히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마련이다. 역사를 망각하지 않은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미국의 역사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고어 비달은, “미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아니라 ‘망각의 합중국’(United States of Amnesia)”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되
는 순간,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로부터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지금의 국가정보원 그리고 검찰에 이르는 권력기관의 민주주의 유린에 대한 소상한 조사와 함께, 이들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통제가 절실하다. 처치위원회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 국회와 시민사회에 중요한 역사적 참고가 되어야 한다. 처치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권력에 대한 ‘영구적인 감시’(eternal vigilance)가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price of liberty)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권력기관은 불법을 저지른다.” 권력은 방치하면 언제든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은 우리가 깨어 있는 한 마침내 몰락한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남베트남 쿠데타 기획한 CIA
닉슨이 사임한 뒤 조직된
미 상원 ‘처치위원회’는
이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과
시민권리 침해 사례들을 조사 CIA도 국내 사찰활동 벌였다
반전운동가 미행하며 도청하고
언론에 비난기사를 싣게 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하고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를 통해
시민들 결혼생활까지 깼다 1970년대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냉전정책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생겨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닥쳐온 군수산업의 위기를 ‘새로운 적’을 만들어 대응해 나간 미국의 냉전정치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했던 미국 시민들의 반발을 국가안보의 명분으로 억누른다. 미국 하원의 ‘비미국인 활동 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조사 대상이 된 사람들은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이른바 ‘안보국가’(Security State)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중앙정보국(CIA)에 의한 외국 지도자 암살, 쿠데타 기획과 지휘, 연방수사국(FBI)에 의한 국내 정치 개입, 언론인과 인권운동 지도자 등에 대한 수십년간의 비밀사찰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국가기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아 나간 것이 상원 ‘처치 위원회’(Church Committee)였다. 아이다호 출신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 위원장의 이름을 따 1975년에 출범한 이 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정보활동에 관한 정부의 운영정책 검토 소위원회’였다. 그들은 알고보니 불법조직이었다 이에 앞서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절정에 이른 1971년, 연방수사국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시민운동 단체에 의해 최초로 폭로된다.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해서 심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비밀 사찰한 연방수사국의 방첩프로그램 코인텔프로(COINTELPRO: Counter Intelligence Program)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중대한 문건이 공개된다. 국무부에서 베트남전쟁 종결 과정에 관여했던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대니얼 엘즈버그가 베트남 비밀개입 전략이 상세하게 기록된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폭로한 것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작성을 지시한 이 문서에는 중앙정보국이 베트남 정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쿠데타를 진행시켰으며, 어떤 암살행위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는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아직 진상의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1971년 8월에는 1944년 이래 브레턴우즈 체제의 약속에 따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교환해주던 금 태환 시스템이 붕괴된다. 그 이듬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은 또 하나의 시대적 격변을 예고한다. <펜타곤 페이퍼>, 코인텔프로, 베트남 반전 운동 등은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고, 당연히 닉슨은 자신감을 갖는다. 그는 재선 준비팀을 가동하다가 결국 무리수를 쓰고 만다. 1972년 6월 전 중앙정보국 요원이 투입된 민주당 선거사무실 난입이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내세운 지 겨우 4개월 만이었다. 1974년 닉슨은 불명예 퇴진을 하고 정부 권력기관에 대한 처치위원회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중앙정보국, 연방수사국, 그리고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 등은 이 과정에서 의회의 감독과 관리 대상이 되었다. 처치위원회는 “이 위원회 설립 결의의 가장 중대한 강조점은 미 정부기관의 정보활동이 ‘미국 시민들의 권리’를 위협했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위원회는 국가안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정보기관에 대한 강력한 통제 수단이 강구되지 않으면 “민주사회가 위협받고 미국 사회의 본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세 가지 유형의 활동을 그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첫째는 프락치 잠입, 도청, 편지 뜯어보기 등의 비밀 사찰활동, 둘째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대중적으로 확산해서 목표가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공공의 적처럼 만들어버리는 행위, 셋째는 목표가 되는 개인과 단체를 파괴하거나 사회적으로 추방당하게 하는 비밀활동 등. 이러한 활동을 조사하면서 처치위원회가 집중한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 정부의 어떤 기관이 민간인 사찰에 관여했는가? 2. 얼마나 많은 수의 시민들이 정보기관의 사찰 목표가 되었는가? 3. 정보기관의 사찰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4. 단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는가? 5. 목표가 된 시민들의 사적 생활과 관련된 정보도 수집되어서 그 개인의 삶을 훼손하는 데 이용된 적이 있는가? 6. 정보기관이 사찰 대상이 된 단체나 개인의 신뢰를 파손하고 그 조직이나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활동을 한 바 있는가? 7. 상부기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였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행위였는가? 8. 정보기관은 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9. 정부와 의회는 정보기관을 통제하고 책임을 묻는 조처를 얼마나 취해왔는가? 10. 전체적으로 봐서, 삼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정보기관 통제에 제대로 작동했는가?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것은, 이들 정보기관이 미국 헌법의 기본조항들을 모조리 위반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알고 보니 불법조직이었다. 국내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중앙정보국도 카오스(CHAOS)라는 이름의 국내 사찰활동을 벌였다. 이들 정보기관들은 마피아를 동원해서 피델 카스트로 제거 계획을 세우거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모르게 심리통제 약물 시험을 하는가 하면, 반전 운동가들에게 도청 등 대대적인 비밀사찰을 하고 언론에 이들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싣게 해서 이들의 대중적 영향력과 신뢰를 훼손한 것은 기본이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만들거나 결혼생활까지 파괴하는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 등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유린하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은 처치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명령 11905를 통해 대외정보기관에 대한 의회의 감독을 강화하고, 암살을 비롯해 제3국에 대한 비밀개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으며, 1978년 지미 카터는 대통령 명령 12036을 통해 더욱 강화된 정보기관 감독 법률을 시행했다. 레이건·부시 정권 때 뒤집어져 그러나 1981년 레이건은 대통령 명령 12333으로, 처치위원회의 결정을 완전히 뒤바꿔 정보기관의 기능을 확대강화하고 중앙정보국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미 연방정부기관은 정보 제공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네오콘(강경 보수파)의 태동이었다. 20년 뒤 이들 네오콘이 권력을 쥐는 부시 때는 대통령 명령 13470을 바탕으로 정보기관의 기능을 최강으로 확대하는 역전이 일어났다. 처치위원회의 노력이 무산되는 순간이자 미국 민주주의 위기가 재론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2008년 처치위원회의 보고서가 이런 상황에서 재출간된다. 역사적인 문서가 현실적으로 의미심장한 책자가 된 것이다. 결국 의회의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 언론의 비판기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각성된 의식과 문제제기가 있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관의 민주주의 유린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국가안보 논리는 꾸준히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마련이다. 역사를 망각하지 않은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미국의 역사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고어 비달은, “미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아니라 ‘망각의 합중국’(United States of Amnesia)”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되
김민웅 성공회대 사회과학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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