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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권력은 나눌수 없다…터키를 흔드는 두 남자

등록 2014-03-27 20:17수정 2014-03-28 10:47

펫훌라흐 귈렌(왼쪽)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오른쪽)
펫훌라흐 귈렌(왼쪽)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오른쪽)
[세계 쏙] 잇단 선거 앞둔 터키는 지금…
온건 이슬람 표방 성직자 귈렌 vs 이슬람·권위주의 강화 에르도안
한때 연합·공조하다 2010년 ‘마비 마르마라호 사건’ 사이 틀어져
30일 지방선거·8월 대선·내년 총선…잇단 정치일정 불확실성 증대
지난해 여름 온나라를 달군 반정부 시위로 혼란스러웠던 터키가 이젠 ‘두 남자’의 격렬한 전장이 됐다. 이슬람주의와 권위주의 정치를 강화하려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0) 총리와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터키의 대표 성직자 펫훌라흐 귈렌(73)이 그 주역이다. 30일 지방선거, 8월 대선, 내년 총선 등 줄줄이 이어지는 정치 일정표는 가뜩이나 시스템이 취약한 터키의 정치·경제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측근들이 부패 수사에 휘말리면서 휘청거렸던 에르도안 총리는 아들과 현금 10억달러 은닉 방법을 상의하는 내용의 녹취파일이 공개되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공격의 배후로 귈렌을 지목했다.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귈렌 추종자들이 아니라면 이처럼 대담한 수사와 불법 녹취 등을 저지를 수 없다는 주장이다. 1999년부터 지병을 이유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머물고 있는 귈렌은 이를 즉각 부인했다. 그는 “도둑을 잡지 않고 도둑을 잡으려는 이들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신이여, 그들의 집을 불태우소서”라고 저주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강경 이슬람주의인 성직자 세력과 세속주의 정부라는 이분법이 적용되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전개 양상이 다르다. 이슬람 세계에서 귈렌은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세속국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시장주의를 옹호한다. 봉사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사업가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방문물의 적극적인 수용,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중시해 1998년 바티칸에 가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접견하기도 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귈렌은 <뉴욕타임스>에 “테러는 예언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장문의 기고문을 실었다.

귈렌의 지지자들은 1980년대부터 학생 기숙사, 대입 준비학원, 교사협회, 출판사, 잡지사 등을 만들어 교육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그들은 이슬람 사원(모스크)보다도 학교를 짓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 전세계 100여개국에서 ‘성실한 신자, 충성스런 시민, 과학에서 경쟁력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1000여개의 사립학교(귈렌학교)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귈렌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나중에 터키의 정관계, 사법부 등으로 진출해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의료(이스탄불 세마병원 등), 금융기관(방크아시아), 언론(<사만욜루 텔레비전>·일간 <자만지>등) 에서도 귈렌주의자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실용·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 귈렌은 ‘터키의 간디’도 아니고, 세속주의와 조화를 이룬 개방된 이슬람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터키의 호메이니’도 아니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중동학)는 “새로운 무슬림운동의 개척자”라고 평가했다.

한국에서도 귈렌은 낯설지만은 않다. 그는 지난해 종교의 화해와 국경을 초월한 봉사를 인정받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에도 레인보우국제학교(RIS) 등 귈렌과 연관된 교육기관이 3곳 가량 된다.

반면, 에르도안은 애초부터 이슬람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이슬람주의 가치를 정치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믿는 네즈멧틴 에르바칸이 이끄는 ‘민족구국당’, ‘복지당’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1994~1998년엔 이스탄불 시장으로 물부족·쓰레기·공해 문제 등을 해결하는 성과를 이뤘으나, ‘모스크는 나의 요새’라는 내용의 시를 대중 앞에서 낭송했다가 종교·인종 혐오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4개월 동안 복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01년 정의개발당을 창당한 에르도안은 정치적 변신을 꾀한다. 이듬해 총선에서 유럽연합 가입 등 친서방적 공약을 표방했고 그 결과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희수 교수는 “터키에선 이슬람을 존중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수동적 세속주의’ 지지자가 70% 가량을 차지하는데, 에르도안은 이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귈렌 지지자들이 에르도안과 뜻을 같이한 것은 이 지점이었다. 터키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800만여명의 귈렌 추종자들은 능력도 있고 세속주의와 화해한 에르도안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밀월 관계는 정의개발당 집권 1기(2002~2007년) 동안만 유지됐다. 독자적 정치 기반을 닦은 에르도안은 점차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귈렌과 에르도안이 공개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마비 마르마라호’ 사건이었다. 당시 터키가 이끄는 국제단체의 구호선 마비 마르마라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직접 구호물자를 전달하려다가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구호 대원 9명이 숨졌다. 에르도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과 각을 세우며 자신을 이슬람권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귈렌은 “중요한 것은 고통받는 가자지구에 실제로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이라며 “국제적으로 마찰만 일으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에르도안을 비판했다. 에르도안은 즉각 ‘귈렌은 외세와 내통하는 매국노’라고 몰아세우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랭했다.

두 사람과 터키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 시험대는 30일 지방선거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농촌 지역에서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에르도안은 30일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만, 수도 앙카라에선 패배할 것이고 자신이 시장을 지낸 이스탄불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귈렌 세력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귈렌주의는 본래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할 가능성이 낮다. 미국 노스이스턴대학의 사회·국제학부 조교수인 베르나 투람은 <알자지라> 기고에서 “귈렌 지지자들은 정의개발당을 싫어하지만, 쿠데타·인권 침해와 관련 깊은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에 표를 몰아주기도 쉽지 않다”고 내다봤다.

이유주현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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