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일본 도코로자와 항공발상기념관이 소장중인 호리코시 지로의 사진, 오른쪽은 도코로자와 기념관이 소장중인 제로센의 도면.
[토요판] 커버스토리
제로센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초상
가미카제 활용된 전투기 열광하는 일본
설계의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의 초상
제로센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초상
가미카제 활용된 전투기 열광하는 일본
설계의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의 초상
2014년 일본인의 심리에 한 전투기가 놓여 있다. 제로센은 2차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로 ‘영식함상전투기’를 줄여 일컫는 말이다. 일본인은 열광하고 한국인은 우려한다. ‘제로센 현상’이라 부를 만 하다. 지난해 12월 제로센과 가미카제를 소재로 한 영화 <영원의 제로>가 개봉된 뒤 8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영화의 원작인 동명의 원작 소설은 누적 530만부가 팔렸다. 2015년에는 드라마로 만든다. 이 전투기를 설계한 천재적 전투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삶은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로 지난해 7월 조명됐다. 일본 최초의 비행장을 기념해 만들어진 도코로자와 항공발상기념관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4월까지 호리코시 지로의 출생 110주년을 맞아 ‘호리코시 지로의 생애’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또한 미국의 박물관에 보관된 제로센을 고향인 일본에 가져와 하늘에 날리자는 ‘제로센 귀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 21~24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제로센 공개 특별전시회가 개최됐다. 제로센은 일본인의 심리를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다. 한국에는 논란으로만 소개된 전투기 설계자의 삶을 자서전과 기록으로 엿봤다. 현지에서 열린 행사도 직접 취재했다.
▶호리코시 지로의 삶과 업적에서 2014년 적지 않은 일본인이 심리적 위무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인들은 그가 활동한 제국 일본의 과거가 아니라 단지 그의 기술적 성취에서 영감을 얻을 뿐이라 설명한다. 자서전과 기록에서 드러난 호리코시 지로는 모순을 가진 인간이었다. 순수하게 전투기의 아름다움에 열광한 직업인이었으나 전쟁의 시대에 국가의 요구를 충실히 따른 국민이기도 했다. 그의 삶을 따라가는 독자는 ‘기술은 역사에서 자유로운가’라는 보편적 질문과 마주치게 된다.
모험을 사랑한 천재, 열심히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그때 하늘을 나는 것은 기적이었다. 소년은 1903년 6월22일 일본 간토(관동)지방 서북쪽의 군마현 후지오카시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문학소년”이었다. “특히 역사물을 좋아했다.” <세키가하라군기>, <삼국지>, <메이지태평기>, <테베의 발흥>, <줄리우스 시저>, <나폴레옹>, <링컨 이야기> 등 집에 있는 역사소설을 다 읽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17세기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그의 자손들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220여년 동안 일본을 통치했다. “학생 시절에 수학이나 이과 과목을 좋아했다는 기억은 없다”고 회상했다. 소년은 소년잡지의 비행기 이야기에 매혹됐다.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03년 12월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했다는 사실도, 훗날 알게 되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그해 태어난 소년
강철과 기관차의 시대였다. 소년이 소학교 학생이 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근대과학이 전쟁에 총동원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군대는 더 많은 병사를 더 과학적으로 살육했다. 비행기도 전쟁에 사용됐다. 소년은 서부전선에 관한 기사와 비행기 공중전에 대한 기사가 가득 실린 잡지 <비행소년>과 <무협세계> 등을 읽었다. 특히 서부전선의 화려했던 니외포르(뉴포트. 프랑스 전투기), 스파드(프랑스), 포커(독일), 솝위드(영국) 등의 유럽 각국의 신예 전투기에 어린 소년의 “피가 끓었다”. 소년은 자주 나는 꿈을 꿨다. “스스로 제작한 가볍고 작은 비행기를 타고 들 넘고 산 넘어 저공비행하는 즐거운 꿈을 자주 꿨다”고 훗날 회상했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행기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다 소학교 학생 시절의 꿈을 떠올렸다. 때마침 친형의 친구 중에 이제 막 개설된 도쿄(동경)제국대학 공학부 항공학과 조교수가 있었다. 항공기 기체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관심이 갔다. 소년은 다이쇼 13년(1924년) 4월 도쿄제대 항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제대 항공학과 학생 수는 26명, 교수진은 교관, 교수, 비상근 강사까지 다 합쳐 13명에 불과했다. 26명 중 한 명이던 소년 호리코시 지로는 훗날 ‘제로센 설계자’로 기록된다. 비행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가 거기서 태어났다.
호리코시 지로는 순수하게 비행기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회고록의 행간에는 비행기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엿보인다. 한국관광공사 통계를 보면, 2014년 8월 한국의 해외여행객은 154만여명이었다. 거의 다 비행기를 타고 출국한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은 기적이었으나 2014년 사람들은 기적을 평범하게 체험한다. 그러나 호리코시 지로의 시대에 하늘을 나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만 할 수 있는 체험이었다.
‘에어버스 380’처럼 500석 이상의 사람을 한꺼번에 실어나르는 대규모 비행기에서 ‘비행의 감각’을 느끼기는 어렵다. 얼굴을 때리는 공기의 흐름도 느끼지 못하며, 중력을 느낄 만큼 선회하는 경험도 하지 못한다. 중력을 거슬러 선회하면 당장 탑승객의 항의를 듣게 된다. 호리코시 지로는 항공학과에 입학한 다음달인 1924년 5월 처음으로 ‘나는 감각’을 경험했다. 당시 도쿄제대 항공학과는 일본 육해군에 의뢰해 소속 학생들에게 비행 체험을 하게 했다. 이바라키현 가스미가우라에 있던 해군 항공대에 호리코시 지로는 1학년 동기생들과 함께 갔다. 영국제 연습기 ‘아브로’를 탔다.
“비행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밑을 보니 지면이 줄무늬처럼 후방으로 흘러갔다. 지면으로부터 오는 덜덜거리는 반동이 없어진다고 생각한 직후 비행기 바퀴가 지면을 벗어났다. 밑을 보려고 얼굴을 내밀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갑자기 전방에 보이던 지평선이 지면과 함께 오른쪽으로 회전해 기수 아래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머리가 아래로 눌려 머리를 들고 손을 올리는 것이 이상하게 힘든 상태가 됐다. 그것은 비행기가 스턴트, 즉, 곡예비행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상에 내리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맹렬하게 서양을 따라잡으려 했다. 유럽 열강 가운데 후진국이었지만 아시아에서 선두였다. 항공 개발의 역사도 일본의 이런 맹렬한 서양 따라잡기의 역사를 보여준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비행에 성공한 뒤에도 일본은 비행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대신 일본 육군은 1907년 열기구 부대를 편성했다. 일본 육군의 도쿠가와 요시토시 대위가 1910년 12월19일 프랑스제 앙리 파르망 복엽기(두 개의 날개가 위아래로 달린 비행기)를 4분간 몰아 일본 최초의 비행에 성공했다.
한국의 항공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늦고, 더 누추하다. 최초의 비행장은 일본 육군이 1916년에 만든 여의도 비행장이다. 현재의 여의도공원 자리에 있었다. 호리코시 지로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조선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조선의 하늘을 난 것은 1922년이었다. 일본의 비행학교에서 배운 기술로 조종했고, 영국제 뉴포트 단발 복엽기를 몰았다.
1911년 5월17일 사이타마현의 도코로자와 비행장에서 일본 국산 비행기 ‘나라하라식 제2호기’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일본은 맹렬하게 모방하고 열심히 따라잡았다. 자체 힘으로 수상 전투기도 만들었다. 1921년에는 최초의 항공모함 호쇼를 진수했다. 항공학과 대학생 호리코시는 이런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전투기 설계자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호리코시는 학교생활을 즐겼다. “이후 3년의 대학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다만, 항공기의 역사가 아직 짧아 유럽과 미국에서조차 항공 관련 과학과 기술 수준이 얕았다. 도쿄제대 항공학과도 “강의의 계통도 없고 내용은 급하게 긁어모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3년의 대학생활을 마친뒤 1927년(쇼와 2년) 4월 미쓰비시 내연기 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미쓰비시 중공업 소속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가 그의 직장이 됐다. 미쓰비시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는 군마현의 나카지마 비행기와 더불어 군용기 생산·설계의 쌍벽이었다.
호리코시 지로의 삶은
애니메이션과 달랐다
기술자로서 전투기에 열광했고
난징 침공에서의 전과에
환호하며 신문을 읽었다 해군으로부터 계획 요구서 받은
‘12번 함상전투기’가 바로 제로센
전쟁 초기에 미국 전투기를
기동성과 항속거리에서 압도
그것은 경량화로 가능했다 천재적 설계자로 인정받다 그는 명석했다. 사람들도 그를 인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책을 맡았다. 1932년 그는 29살의 나이에 최초로 전투기 설계의 주임을 맡았다.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7번 실험기’가 그에게 주어졌다. 입사한 지 5년 만이었다. 5년 동안 실무를 통해 항공기를 공부했다. 회사의 파견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비행기 공장을 시찰했다. 여러 나라의 항공기술 관련 간행물을 수집해 조사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을 일으킨 지 일년 뒤였다. 그는 이어 제로센의 전신에 해당하는 전투기를 설계하며 크게 성장했다. 1934년 해군으로부터 ‘9번 시험기’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바로 그 전투기다. 훗날 정식 채용된 뒤 ‘96식 함상전투기’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다. 땅에서 이륙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함상전투기’다. “근대국가에 있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국가가 친구의 편지를 검열하자 경찰을 피하는 차 안에서 젊은 호리코시 지로는 이렇게 항의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에 나오는 장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호리코시 지로를 ‘전쟁을 싫어했지만 시대와 국가에 그저 휩쓸려간 불행한 과학자’로 묘사했다. 소설의 연애 이야기를 가공해 넣었다. 그러나 실제로 호리코시 지로가 남긴 자서전과 에세이 속에서 그는 ‘고뇌하는 반전주의 과학자’와 거리가 있었다. 그는 모순된 인간에 가까웠다.
자서전 속의 호리코시 지로는 자신이 만든 전투기가 전쟁에 사용되며 사람을 살상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설계한 전투기의 성과에 뿌듯해했다. 96식 함상전투기가 중일전쟁에 사용된 사실을 그는 자랑스럽게 기록한다. “우리의 96식 함상전투기의 위력은 쇼와 12년(1937년) 7월에 시작된 일화사변(일본인이 중일전쟁을 부르는 명칭)에서 실증됐다. 내가 그것을 안 것은, 같은 해 9월19일 아침이었다. 당시 회사 업무가 7시 반에 시작했으므로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제나 신문을 읽으며 아침식사를 했다. 그날 아침도 급하게 된장국을 먹으며 신문을 읽어내려갔다. 1면 톱에 보이는 96식 함상전투기의 사진이 있었고, 난징 상공에서 적기 30여기를 격추시켰다고 큰 활자로 보도됐다. 나는 엉겁결에 ‘호!’라고 소리를 질렀다. 보통 회사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옆에 있는 부인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그 신문을 들고 회사에 갔더니 이미 회사 안은 이것(난징에서의 전과)이 화제였다.”(<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1945년 패전까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호리코시 지로는 순수하게 자신의 성과에 기뻐했지만,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 일본 안팎의 정세도 극단으로 치달았다. 내부적으로 일본은 의회주의의 역할이 사실상 정지하고 군국주의 체제로 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영감을 줬던 2·26 사건이 1936년 벌어졌다. 젊은 극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 등 주요 기관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쿠데타 시도가 벌어졌다. 결국 진압되지만, 이 사건은 일본 파시즘을 불렀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은 최근까지도 중-일 사이의 중요한 외교 이슈다. 그런 전쟁에서 자신의 전투기가 사용된 보도를 보며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호리코시 지로는 이탈리아인 비행기 설계자 카프로니 백작과 꿈속에서 자주 만난다. 이탈리아인 비행기 설계자는 전쟁에 반대하며 군용기 설계를 싫어했다. 그와 꿈에서 자주 만나는 호리코시 지로도 군용기 설계보다 민간기 설계를 꿈꾼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러나 호리코시 지로는 전쟁의 성과를 자랑스러워했다. “일본 해군은 전투기를 가지고 제공권을 확대하는 것이 항공전의 기본이라는 병술을 세계에서 앞질러 도입했다”고 뿌듯해했다.
해군의 터무니없는 요구, 제로센의 시작
호리코시 지로는 난징에서의 전과를 보도한 신문을 읽은 지 사흘 뒤 해군으로부터 ‘12번 시험함상전투기’ 계획요구서를 받았다. 그를 지금 유명하게 만든 ‘제로센’이다. 자서전에서 그는 제로센의 설계 과정의 에피소드, 고민, 설계 철학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최근 제로센 열풍을 만든 것은 미국과의 전쟁 초기에 미국 전투기를 압도했던 기동성과 항속거리였다. 그것은 경량화로 가능했다. 호리코시 지로는 설계 초기 단계부터 ‘경량화’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속도에 따라 프로펠러의 각도가 조정되는 신기술을 채택했다. 기술자 호리코시 지로는 성실하고 창의적이었다. 자서전 곳곳에서 그는 “(항공기 설계의)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반복해서 썼다. 눈치 보지 않고 신기술 도입에 앞장섰다.
비행의 꿈은 낭만적이지만, 비행기 제작의 현실은 지독히 현실적이었다. 호리코시 지로가 제로센 설계를 발주받을 당시, 일본은 전쟁총력체제로 사회를 재구조화했다. 제로센 개발은 민간회사가 만들어 군에 수주하는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1938년 해군의 새로운 함상전투기 요구서를 검토하기 위해 민관합동연구회가 열렸다. 해군 수뇌부,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전투기 조종사, 미쓰비시 연구자, 경쟁사인 나카지마 연구원 등 수십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로센을 만드는 과정을 호리코시 지로는 ‘불가능에의 도전’이라고 자서전에서 불렀다. 그는 자서전 곳곳에서 당시 해군의 요구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완성된 제로센은 진주만 공습 등 전쟁 초기에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12번 시험함상전투기는 1940년 최종적으로 해군에 채용됐다. 그해 일본이 기원한 지 2600년 되는 해라고 일본인들은 기념했다. 뒷자리의 숫자 ‘0’을 따서 ‘영식 함상전투기’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다. 곧 사람들은 제로센이라고 줄여 부르기 시작했다.
호리코시 지로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애매하다. 중국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이나 반대의 뜻도 갖고 있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대해서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승산이 없어서’라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나치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사실을 신문에서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고 썼다. “나치 독일이 1차대전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독일의 앞길은 어두우며 그런 독일과 발걸음을 나란히 하는 것은 일본한테 위험한 내기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악몽과 같은 나날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진주만 공습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했다. “‘제국 육해군이 오늘 8일 새벽에 태평양에 있는 미·영국과 전투에 돌입했다.’ 쇼와 16년 12월8일 오전 6시 임시 라디오 방송이 전국민을 놀라게 했다. 나는 그 뉴스를 듣고 처음에 ‘설마’라고 생각했다.” 호리코시 지로는 “국민의 한명으로 복잡한 불안과 긴장감을 느꼈다”고 썼다. “나는 아메리카의 땅의 자원과 부유함, 엄청난 공업력과 항공기술을 잘 안다. 특히 보급력에 있어서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 쪽이 물질과 원료가 약하다”고 썼다. “전쟁을 오래 끌수록 일본에 불리하다는 비관적인 예상을 했다.” 그러면서도 호리코시 지로는 미국과 전쟁 초기 제로센의 전과를 설명하는 챕터의 제목을 ‘태평양 상공에서 무적’이라고 달았다.
그의 예상대로 일본은 패전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미쓰비시와 나카지마를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기업으로 판단해 해체를 명령했다. 전후에 호리코시 지로는 민간항공기 와이에스-11에 다른 비행기 설계자와 함께 공동으로 참여했다. 그는 미쓰비시를 떠나 1963년부터 2년간 도쿄대 우주항공연구소에 몸담았다. 일본 국방연구원 교수로 1965~1969년 활동했다. 1972~1973년은 니혼대학 교수였다. 1973년에 욱일훈장을 받았다. 1875년에 생긴 가장 오래된 훈장이다.
1970년 3월에 쓴 자서전의 말미에서 그는 가미카제를 비판했다. “쇼와 19년(1944년) 10월 하순의 신문에 ‘가미와시(일본의 신)의 충렬, 만세에 빛나리’, ‘적 함대를 포착해 필사적으로 몸 던져’라는 제목으로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나는 6월 마리아나 함락을 알았을 때 일본의 패전은 결정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기사를 읽으며 ‘결국 여기까지 쫓기게 된 것인가’라는 느낌이 강하였다… 힘이 크게 차이 나는 적과 맞닥뜨렸을때, 도망칠 수 없는 입장의 일본 무사가 따를 수 있는 무사의 도가 이것밖에 없는가라고 나는 가슴에서 격한 통증을 느끼며 울었다. 나는 그 가미카제 특공대의 비행기로 제로센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
그는 1944년 <아사히신문> 오사카출판국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기 위해 원고 청탁을 한 일화도 소개했다. 각계 인사 열명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는 단문을 싣는 책의 기획이었다. “의뢰받은 지 한 달이 다 된 쇼와 20년(1945년) 정월 연휴였다. 나는 무조건 특공대(돗코다이)를 찬양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왜 일본은 이기리라는 희망이 없는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왜 제로센은 그렇게 사용되어야만 했는지, 언제나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물론 당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
미야자키 하야오의 묘사와 달리, 그는 하늘을 영토로 삼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의 일본에 뿌리박고 산 국민이었다. “내가 나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어색하지만, 일본인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방과 소세공업에만 뛰어난 민족이었다면 제로센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세계 기술의 조류에 올라타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으며, 세계의 중심 속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잘 생각해서 독특한 사고방식과 철학에서 설계된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제로센이다. 이 점에서 제로센이 아직까지 낡은 것으로 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는 1970년(쇼와 45년) 3월1일 회고록 <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1982년 1월 숨졌다.
기술자로서 성실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나
역사인식은 치열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에는 환호했고
진주만 습격은 반대했다 “독특한 철학에서 설계된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비행기’
그것이 바로 제로센”
조선 식민지배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 자서전 나치 반대한 후고 융커스와 비교하면 그는 역사감각이 치열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나치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던 동시대의 비행기 설계자 후고 융커스(1859~1935)에 비하면, 호리코시 지로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독일 융커스사를 만들고 비행기를 설계한 후고 융커스는 나치에 반대했다가 훗날 가택연금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호리코시 지로는, 시대의 의미에 눈을 감고 성실하게 살아 불행한 기술자다. “열심히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결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연합뉴스>를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난해 7월 <바람이 분다>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한국 언론과의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이 의식은 안 했겠지만, 그가 만든 비행기가 태평양전쟁에 쓰였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호리코시 지로의 자서전에는 중국은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한국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징용, 한국인 출신 가미카제 조종사, 식민 지배의 문제 등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조선인 출신들의 하늘을 나는 꿈에도 무심하고 무지했을 것이다. 호리코시 지로보다 2년 먼저 태어나 일본 비행학교를 나온 한국 항공 1세대 신용욱이나 최초의 여자 비행사 박경원은 모두 불행하게 숨졌다. 기술자로서 그는 일본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지금 영감을 준다. 도코로자와 항공발상기념관의 홍보담당 곤도 아키라는 23일 “호리코시 지로의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를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 “무엇보다 당시 기술의 한계 속에서 경량화를 달성했고 일본이 근대적 항공개발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세계 수준에 다다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70여년 전 인물이므로 현재 일본의 항공기 전공자들에게 호리코시 지로가 널리 알려지거나 롤모델은 아니지만 지난해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호리코시 지로를 다룬 애니메이션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제로센이 훗날 가미카제에 이용됐다는 점이 가장 많이 부각된다. 한국이 호리코시 지로를 비난하는 근거인 가미카제는 ‘조선인 가미카제’를 고리로 한국의 역사와 맞물린다. 조선인 출신 전투기 조종사 가운데 전쟁 막바지 가미카제에 약 20여명이 지원한 것으로 조사된다. 이 중 일부는 출전해 사망했다. 경남 사천 출신으로 몇 해 전 일본인들이 위령비를 건립하겠다고 나섰다가 되레 한국에서 논란을 샀던 탁경현이 대표적이다. 가미카제 특공대 외에도 다수의 일본군 출신 조선인 조종사들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는 데 일조했고, 민간 항공사 탄생에도 역할을 맡았다.
기술은 역사에서 자유로운가
호리코시 지로는 모순적 인간이었다. 순수하게 전투기의 아름다움에 열광한 직업인이었고 동시에 전쟁의 시대에 파시즘 정부의 요구를 충실히 따른 국민이기도 했다. 어려서 역사소설은 좋아했으나 현실의 역사인식은 무뎠고, 중일전쟁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나 미국과의 전쟁과 가미카제 특공대에는 반대했다. 그의 삶을 따라간 길의 막바지에 ‘기술은 역사에서 자유로운가’ ‘한국은 식민지와 독재의 역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라는 보편적 질문과 맞닥뜨리는 사람이 많을 것같다. 지금 일본의 대중은 호리코시 지로의 모순보다 그의 모험에만 주목하는 것 같다. 이 바람은 계속 분다.
※참고문헌: <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호리코시 지로, 가도카와문고, 1970년), <제로센의 유산-설계주무자가 설명하는 명전투기의 맨얼굴>(호리코시 지로, 고진샤 NF문고, 2003년), <항공 70년사 1-라이트 형제에서 제로센까지 1900~1940>(아사히신문 세계의 날개 편집부, 1970년),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길윤형, 서해문집)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제로센 복원 추진 단체인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의 이시즈카 마사히데가 소유한 제로센이 지난해 하늘을 나는 모습. 맨 위 사진은 도코로자와 항공발상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제로센의 도면집과 호리코시 지로의 사진을 함께 찍은 사진.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 제공, 도코로자와항공발상기념관(기증 호리코시 지로) 제공
1970년대에 파푸아뉴기니 밀림에서 추락한 제로센 기체가 발견됐다.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
애니메이션과 달랐다
기술자로서 전투기에 열광했고
난징 침공에서의 전과에
환호하며 신문을 읽었다 해군으로부터 계획 요구서 받은
‘12번 함상전투기’가 바로 제로센
전쟁 초기에 미국 전투기를
기동성과 항속거리에서 압도
그것은 경량화로 가능했다 천재적 설계자로 인정받다 그는 명석했다. 사람들도 그를 인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책을 맡았다. 1932년 그는 29살의 나이에 최초로 전투기 설계의 주임을 맡았다.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7번 실험기’가 그에게 주어졌다. 입사한 지 5년 만이었다. 5년 동안 실무를 통해 항공기를 공부했다. 회사의 파견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비행기 공장을 시찰했다. 여러 나라의 항공기술 관련 간행물을 수집해 조사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을 일으킨 지 일년 뒤였다. 그는 이어 제로센의 전신에 해당하는 전투기를 설계하며 크게 성장했다. 1934년 해군으로부터 ‘9번 시험기’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끝이 날렵하게 올라간 바로 그 전투기다. 훗날 정식 채용된 뒤 ‘96식 함상전투기’라는 정식 명칭을 얻었다. 땅에서 이륙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함상전투기’다. “근대국가에 있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국가가 친구의 편지를 검열하자 경찰을 피하는 차 안에서 젊은 호리코시 지로는 이렇게 항의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에 나오는 장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호리코시 지로를 ‘전쟁을 싫어했지만 시대와 국가에 그저 휩쓸려간 불행한 과학자’로 묘사했다. 소설의 연애 이야기를 가공해 넣었다. 그러나 실제로 호리코시 지로가 남긴 자서전과 에세이 속에서 그는 ‘고뇌하는 반전주의 과학자’와 거리가 있었다. 그는 모순된 인간에 가까웠다.
도코로자와항공발상기념관(기증 호리코시 지로) 제공
최근 사이타마에서 공개된 제로센은 1970년대에 발견된 뒤 미국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엔진 교체와 수리를 거쳐 비행 가능한 상태로 복원돼 미국에서 몇차례 비행에 성공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기체를 분리한 모습.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 제공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나
역사인식은 치열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에는 환호했고
진주만 습격은 반대했다 “독특한 철학에서 설계된
‘일본인의 피가 흐르는 비행기’
그것이 바로 제로센”
조선 식민지배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 자서전 나치 반대한 후고 융커스와 비교하면 그는 역사감각이 치열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나치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던 동시대의 비행기 설계자 후고 융커스(1859~1935)에 비하면, 호리코시 지로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독일 융커스사를 만들고 비행기를 설계한 후고 융커스는 나치에 반대했다가 훗날 가택연금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호리코시 지로는, 시대의 의미에 눈을 감고 성실하게 살아 불행한 기술자다. “열심히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결과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연합뉴스>를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지난해 7월 <바람이 분다>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한국 언론과의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이 의식은 안 했겠지만, 그가 만든 비행기가 태평양전쟁에 쓰였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호리코시 지로의 자서전에는 중국은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한국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징용, 한국인 출신 가미카제 조종사, 식민 지배의 문제 등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조선인 출신들의 하늘을 나는 꿈에도 무심하고 무지했을 것이다. 호리코시 지로보다 2년 먼저 태어나 일본 비행학교를 나온 한국 항공 1세대 신용욱이나 최초의 여자 비행사 박경원은 모두 불행하게 숨졌다. 기술자로서 그는 일본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지금 영감을 준다. 도코로자와 항공발상기념관의 홍보담당 곤도 아키라는 23일 “호리코시 지로의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를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 “무엇보다 당시 기술의 한계 속에서 경량화를 달성했고 일본이 근대적 항공개발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세계 수준에 다다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70여년 전 인물이므로 현재 일본의 항공기 전공자들에게 호리코시 지로가 널리 알려지거나 롤모델은 아니지만 지난해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호리코시 지로를 다룬 애니메이션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제로센이 훗날 가미카제에 이용됐다는 점이 가장 많이 부각된다. 한국이 호리코시 지로를 비난하는 근거인 가미카제는 ‘조선인 가미카제’를 고리로 한국의 역사와 맞물린다. 조선인 출신 전투기 조종사 가운데 전쟁 막바지 가미카제에 약 20여명이 지원한 것으로 조사된다. 이 중 일부는 출전해 사망했다. 경남 사천 출신으로 몇 해 전 일본인들이 위령비를 건립하겠다고 나섰다가 되레 한국에서 논란을 샀던 탁경현이 대표적이다. 가미카제 특공대 외에도 다수의 일본군 출신 조선인 조종사들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는 데 일조했고, 민간 항공사 탄생에도 역할을 맡았다.
2008년 이비에스(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 경쟁 부문에 오른 일본계 미국인 리사 모리모토 감독의 <가미카제 이야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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