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침몰 땐 “미 항모 서해로”
중국 반발에도 ‘호전적’ 태도
시리아 무력개입·아프간 추가파병 등
“국제분쟁 적극 개입” 강경 노선
민주 대선 후보론 이례적 매파
하사관 딸, 해군 자원 경험
9·11 뒤 상원 군사위서 활약
게이츠 등 부시 관료들 측근에
“우리는 적진을 뚫고 나가야 한다!”
천안함 침몰 넉달 뒤인 2010년 7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보좌관들 앞에서 자신의 ‘호전성’을 드러냈다. 미국 미식축구 명감독인 빈스 롬바디의 명언을 차용해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를 서해에 배치하자고 주장하던 참이었다.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인 제임스 스타인버그는 조지워싱턴호를 동해 연안으로 보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계획을 제안해 조지워싱턴호가 이미 동해로 출항한 상태였다. 하지만 로버트 윌러드 태평양군 사령관은 조지워싱턴호를 서해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지워싱턴호는 중국의 핵심전력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고 몇분 안에 중국 타격도 가능하다. 중국이 조지워싱턴호의 서해행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윌러드는 마이클 멀린 합참 의장을 통해, 멀린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통해 ‘최고사령관’ 버락 오바마를 설득했다. 군 입장에서 ‘서해’는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직접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한편, 중국 견제 효과까지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무부 등 외교라인은 북한을 압박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동해’라는 절충선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국무부 수장인 클린턴이 군 편을 들었다.
국무·국방장관이 모두 ‘서해’를 지지하고 나선 가운데,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나는 항공모함을 가지고 계획도 없이 작전변경을 하지 않는다”고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조지워싱턴호는 동해 대신 서해에 떴을 수 있다.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서 한·미 군사훈련에 참여했다면, 당시 한반도 긴장은 훨씬 더 고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 ‘민주당 매파 대통령’ 아이러니 민주당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사실상 양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면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민주당 매파’ 대 ‘공화당 비둘기파’라는 낯선 구도로 짜였다. 통상 미국 외교정책에서 공화당 후보는 국제문제 개입이나 군사력 사용에 적극적인 매파로, 민주당 후보는 온건한 비둘기파로 분류되지만 이번 대선에선 상황이 뒤바뀌었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힐러리는 어떻게 매파가 되었나’라는 기사를 통해 그를 “대선 경선 레이스에서 마지막 남은 진정한 매파”라고 평가했다. 매파들의 사고는 미국이 세계의 운명을 떠안은 예외적 위치에 있다는 ‘미국 예외주의’에 기반한다. 클린턴의 보좌관은 상관의 차가운 미국 중심 세계관을 언급하면서 “(클린턴은) ‘미국 예외주의’ 견해의 교과서”라고 지적했다.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언론들도 공화당 매파들의 잇단 클린턴 지지 발언을 소개하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부 국장 니컬러스 번스는 “나는 (공화당 대선 후보가 아닌) 힐러리를 지지한다. 주된 이유는 그녀가 미국의 국제 개입에 찬성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상원 외교위 대신 국방위로 클린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군 하사관이자 열혈 공화당원의 딸로 태어났고, 군사시설과 다름없는 백악관에서 8년을 살았다. 또 젊을 때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며 미 항공우주국(나사)에 지원하고, 결혼 직후 해군에 자원했다 퇴짜를 맞을 정도로 성향도 ‘친군’적이다.
클린턴이 정치인으로서 본격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건 상원의원 시절부터다. 2002년 민주당의 중간선거 참패 이후 클린턴은 상원에서 서열 상승을 했다. 당 지도부는 상원 요직인 외교관계위원회와 군사위원회 중 하나를 택하라고 제안했다. 뉴욕주 상원의원들은 전통적으로 외교위를 선호했으나, 클린턴은 달랐다. 9·11 테러 이후 대권 준비를 위해선 군사위가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군사위는 ‘최고사령관’이 되려는 여성이 소프트 파워 대신 하드 파워를 연마하기에 완벽한 훈련소다. 클린턴은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부터 국방부 조달업무까지 모든 것을 연마했다.
■ 클린턴의 펜타곤 네트워크 “클린턴은 전통적인 미 외교정책 지배층 멤버다.” 국무부에서 클린턴에게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문제를 조언했던 외교정책 분석가 발리 나스르의 평가다. 클린턴이 그 지배층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데는 펜타곤(미 국방부) 인맥의 힘이 컸다.
클린턴의 측근인 로버트 게이츠는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에 임명돼 이례적으로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펜타곤 매파 게이츠가 클린턴에게 한눈에 반한 건 오바마 행정부 들어 처음 열리는 미-러 회담을 앞둔 2009년 2월이었다. 당시 오바마의 보좌진은 미국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조처로 ‘상징적인 양보’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게이츠는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펜타곤과)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굳혔다. 외교적 문제에서 클린턴이 다소 우파적이며, 때론 국방부보다 국무장관이 더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군사 문제와 관련해 클린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게이츠보다 잭 킨 전 육군참모총장이 꼽힌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 설계자 중 하나다. 방산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스 이사이며 우파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 소장이다. 보수성향 <폭스 뉴스>의 스튜디오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미국이 이라크·시리아·아프간에 더 많은 군사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펜타곤 매파다. 킨은 2001년 가을 상원의원 클린턴과 안면을 텄고, 클린턴의 적극적인 구애로 친구가 됐다. 그는 클린턴의 최대 약점이 된 2002년 ‘이라크전 결의안 찬성’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킨은 2007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 2만명을 추가 파병하도록 설득하기도 한 인물이다. 클린턴은 2007년 추가 파병에는 반대했는데, 킨은 “(이후) 2008년 무렵 클린턴이 ‘당신이(추가 파병이) 맞다’고 인정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킨은 지난해 클린턴의 ‘시리아 개입’ 공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클린턴은 대권 도전을 공식화하기 전주인 2015년 4월 킨에게 자문을 구했다. 킨은 전쟁연구소의 여성 분석가 3명을 대동하고 클린턴을 찾아 2시간3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6개월 뒤, 클린턴은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공군력을 무력화해 그가 반군 그룹과 정치적 협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며 ‘비행제한구역 설정’을 공식 입장으로 택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작전 중인 러시아와의 충돌 등을 고려해 안 된다고 선을 그은 사안이다.
■ ‘아프간 3만명 파병’의 보호막으로 클린턴이 펜타곤 매파들의 도움만 받은 건 아니다. 클린턴은 펜타곤을 대변하는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자처했다.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은 2009년 12월 ‘아프간 3만명 추가 파병’을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애초 4만명 추가 파병을 요구했다. 3만명 파병을 주장했던 게이츠는 “스탠리가 요구한 것(4만명)에 대한 힐러리의 지지는 단호했다”고 말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에 회의적이었지만, 매크리스털과 게이츠는 물론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중부사령관, 마이클 멀린 합참 의장 모두 추가 파병을 요구했다. 여기에 국무장관 클린턴까지 군 사령관 친구들의 ‘정치적 보호막’이 돼줬다. <뉴욕 타임스>는 “(아프간 추가 파병에서) 클린턴의 아낌없는 지지는 오바마가 좀 덜 과격한 옵션을 선택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결국 아프간 추가 파병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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