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 뉴스’(가짜 뉴스)가 넘실댑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출마 이후부터 극성입니다. 배후에는 음모론이 있습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 ‘대안 우익’의 이데올로기가 음모론에 바탕하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팔아먹고 있다는 음모론입니다. 세계화는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 그리고 공화당의 기성 세력 등 글로벌리스트들이 미국의 이익에는 아랑곳않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글로벌리스트 음모론’은 다기한 음모론을 파생시킵니다.
■백신이 자폐증 유발?=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백악관에서 교사 및 학부모와의 간담회에서 “어린이 자폐증 환자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고, 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켜보기 두려운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자폐증 환자가 급증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심리학자 스티브 실버먼 등 전문가들이 트럼프 발언 이후 미 언론에 밝혔습니다.
트럼프의 이 발언은 어린이에 대한 백신 예방 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반백신 운동 진영의 주장을 담은 것입니다. 이날 간담회에도 반백신 운동을 벌이는 한 학부모가 참석했습니다. 트럼프는 이 주장에 동조해왔습니다. 그는 취임 전 당선자 기간 동안 반백신운동을 벌여온 케네디 가문의 일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백신의 안전을 점검하는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 과정 중 <폭스뉴스>의 진행자 메간켈리와 불화를 빚자, 폭스뉴스가 켈리와 관련된 사우디 왕자의 소유라는 음모론에 바탕한 합성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서 리트윗했다. 이 내용은 폭스뉴스가 알왈리드 사우디 왕자와 그의 여동생, 그리고 켈리가 소유하는 회사라며, 이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라는 내용이다.
의학계는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오도된 음모론이라며 인류 의학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인 예방접종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런 주장을 한 연구는 20년 전에 처음으로 제기됐지만, 관련 데이터가 허위로 드러나 연구 보고는 철회됐습니다.
반백신 운동이 여전한 것은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백신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음모론에 뿌리도 있습니다. 글로벌리스트 음모론의 일환입니다.
■성당기사단에서 시작된 특정 세력의 세계 지배 음모론=세계를 은밀히 지배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은 인류 역사에서 새삼스런 것이 아닙니다. 서양 역사에서 그 뿌리는 성당기사단 음모론입니다. 성당기사단은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움베르크 에코의 <푸코의 추> 등에서도 등장합니다.
유럽의 중세 십자군 전쟁 때 결성됐던 성당기사단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립4세와의 불화로 결국 성당기사단원들은 이단과 음란죄로 처형되고, 재산은 몰수됐습니다. 살아남은 성당기사단원들은 그 후 비밀결사를 유지해,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하고 루이 16세를 결국 처형하는 복수를 벌였다는 음모론이 퍼졌습니다.
성당기사단은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트라는 비밀결사로 계속 유지되면서, 세계를 은밀히 지배하는 세력으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음모론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이작 뉴튼이나 조지 워싱턴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모두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트 회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음모론은 술자리의 뒷담화나, 소설과 영화 등에서 흥미진진한 소재로 쓰이는데 그쳤습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재촉한 유대인 세계 지배 음모론을 퍼뜨린 <시온장로의정서>. 미국에서는 반유대주의자인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이 책들을 출판해 광범위하게 유포시켰다.
■유대인 세계 지배 음모론 <시온장로의정서>는 홀로코스트 재촉=하지만, 우리 인류 역사에 잔인한 상처를 남긴 음모론도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에는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이 있습니다. 1903년 러시아에서 처음 출간된 <시온장로의정서>는 체코 프라하의 공동묘지에 모인 유대교 장로들이 세계 지배 음모 논의를 폭로한 책자입니다. 이 책자는 그 후 유럽과 미국에 번져나갔고, 서방에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를 자극해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을 재촉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자인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자비를 들여서 이 책자를 뿌리고, 이 책자의 내용을 전하는 언론사도 설립했습니다.
<시온장로의정서>는 나중에 파리로 파견된 러시아 스파이가 만든 위조 문서로 밝혀졌습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정치풍자 극작가 모리스 졸리가 저술한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 대화>의 내용들을 차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시온장로의정서>는 지금도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를 주장하는 반유대주의의 대표적 저작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이 책은 번역되어, 마치 근거있는 저작으로 광고되고 있습니다.
■반연방정부주의가 미국 내 음모론의 시작=특정한 세력이 은밀히 세계 지배를 획책한다는 음모론은 미국에서도 뿌리가 깊습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를 부정하는 극우주의 조류가 이어져 왔습니다. 연방정부는 북부의 상공업자 ‘양키’들이 미국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지배하려는 도구라는 주장입니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백인들 사이에서 이런 극우주의가 퍼졌습니다. 이는 백인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결합한 것입니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쿠 클랙스 클랜’(KKK)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조류는 현대에 들어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청사 폭탄테러를 주도한 티모시 맥베이는 연방정부가 권력의 악이라는 확신을 가진 백인 민족주의와 극우주의를 보여줍니다. 맥베이 등은 유엔이 미국을 해체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도구로 봅니다.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세계화 조류는 이런 극우주의를 반세계화 담론과 결합시켰습니다. 세계화 조류 이후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제조업이 주로 위치한 중부 내륙 지방의 백인 주민들의 소외와 불만이 고조됐습니다. 기존의 전통적 극우주의는 세계화가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좌파 진영의 반세계화 담론을 차용해, 소외된 백인 주민들을 파고들었습니다.
■반연방정부주의가 대안우익의 글로벌리스트 음모론으로 진화=이른바 ‘대안우익’(alt-right)이 등장한 것입니다. 대안우익은 기존의 극우주의나 전통 우파와는 달리,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기성세력들도 적으로 규정합니다. 워싱턴의 기성세력, 심지어 진보세력도 글로벌리스트 진영이라는 것입니다.
<인포워즈>와 <브레이트바트뉴스>는 대안우익 음모론의 대표적 뉴스 사이트입니다. 이들 뉴스 사이트는 얼핏보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그 이익을 폭로하는 매체로 보여집니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난하고, 클린턴재단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도들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나와서 논란이 끝난 사실들을 마치 새롭게 드러난 사실처럼 포장해서는 교묘하게 비틀고는 허위 사실들을 첨가하곤 합니다. 일반인들이 이 매체들의 폭로 기사를 보면, 기성 세력들의 거대한 비리가 새롭게 드러낸 것으로 착각합니다. 기성 언론들은 이런 사실에 의도적으로 눈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폭로기사를 보도하면서, 중간중간에 명백한 페이크뉴스를 끼워넣어서는 페이크뉴스도 사실에 바탕한 폭로로 신빙성을 부여합니다.
트럼프가 정치권에 등장한 동력은 바로 이 글로벌리스트 음모론에 바탕합니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 문제를 제기하면서 정치권에 진입했습니다. 오바마는 미국이 아니라 케냐에서 태어났고, 그의 본명은 ‘배리 소웨토’임을 주장하며,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줄곧 주장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자격 중 하나는 미국 본토 출생입니다. 오바마가 재선에 나선 2012년에 그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았으나, 공화당원 사이에서 그의 지지는 급증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는 오바마의 해외 출생설이 근거가 없자, 이 주장은 힐러리 클린턴 진영에서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책임을 돌렸습니다.
■트럼프의 허위주장은 글로벌리스트 음모론이 배경=트럼프는 2015년에 대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이런 음모론과 이에 바탕한 각종 허위 주장으로 지지층을 끌어모았습니다. 멕시코에서 살인자와 강간범들이 미국으로 몰려오니 국경장벽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부터 시작해, “대법원의 보수적 판사 안토닌 스칼리아는 암살됐다”는 주장을 거쳐 “공화당 대선후보 경쟁자였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의 아버지가 존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됐다”, “기후변화는 중국의 농간”이라는 음모론 등을 퍼뜨렸습니다.
<브레이트바트뉴스>의 창업자 스티븐 배넌이 그의 선거 운동 총책임자(CEO)를 맡았고, <인포워즈>의 창업자 알렉 존스가 진행하는 각종 라디오쇼에는 트럼프가 정례적으로 출연했습니다. 알렉 존스는 지난 2012년 12월 미국 코네티컷 샌디훅의 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 등 26명이 죽은 총기참사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고, 초등학생들의 죽음은 어린이 배우들의 연기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클린턴 선거운동 진영의 참모들이 소아성애를 즐기며, 그 장소는 워싱턴 인근의 피자식당 ‘코멧핑퐁’이라는 음모론에 바탕한 페이크뉴스는 결국 이를 믿은 이가 그 식당을 찾아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사임한 백악관 안보보좌관 마이클 플린과 그의 아들인 비서는 이를 트위터에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포워즈>와 알렉 존스가 주장하는 음모론에 바탕한 주장들은 트럼프가 줄곧 주장하는 단골 소재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이상설은 존스가 처음으로 제기하고, 트럼프가 이를 증폭시켰습니다. 트럼프는 2016년 8월 유세에서 클린턴이 4년 전에 뇌진탕을 일으켜, 뇌혈관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앞서 며칠전 <인포워즈>는 ‘힐러리의 기괴한 행태에 대한 진실’이라는 동영상에서 이를 주장했습니다. 클린턴이 9.11 추모식에서 폐렴으로 휘청거리는 모습이 포착되자, 이들의 주장은 일파만파로 퍼졌습니다.
지난 대선에 때 400만표가 부정투표여서 클린턴이 총득표수에서 이겼다는 트럼프의 주장 역시 <인포워즈>가 대선 투표일 몇개월 전부터 주장했던 사안입니다. 존스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막으려고 선거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있다며, 투표소에 카메라맨들을 보내서 클린턴을 위한 불법 투표를 적발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트럼프는 8월초 곧 이 주장을 받아서 투표권이 없는 민주당 성향 불법 이민자들의 투표 시도가 있다고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고, 이는 다시 <인포워즈>를 통해 중계됐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21일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이후 33일간 744시간의 동선과 활동을 분석한 결과, 그가 그동안 132건의 거짓 주장과 사실 왜곡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기자회견에 할애한 시간은 4시간에 불과한 반면, 일방적인 주장을 던지는 트위터는 모두 128건에 18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트럼프의 등장 이후 거론되는 ‘포스트 트루스’(탈 진실) 시대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보이는 음모론에 바탕한 일방적 주장으로 상징됩니다. 음모론은 이제 술자리 뒷담화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진화했습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