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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생기 잃고 빈곤뿐이던 도시에…‘혈색’이 돌아왔다

등록 2017-11-14 18:37수정 2017-11-14 21:14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중] ② 캐나다

해밀턴 등 제조업 쇠퇴지역 거주
18∼64살 빈곤층 주민 4000명에 지급
“복지혜택은 받을때마다 주눅…
게으른 사람 취급받지 않아 좋아”

기본소득 ‘의료사각 해소’ 기여하며
고용·주거안정 해법으로도 이어져
“사회안전망에 악영향” 지적있지만
실패한 빈곤퇴치 정책 대안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주정부가 지난 6월 기본소득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참여를 독려하기위해 제작한 광고문.
캐나다 온타리오주정부가 지난 6월 기본소득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참여를 독려하기위해 제작한 광고문.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사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2세 소피아(가명)는 기본소득 실험 수급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은 지난달 4일을 잊지 못한다. 자신이 사는 도시 해밀턴이 실험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몇차례 설명회에 참석하면서 한가닥 희망을 붙잡고 있던 그였다. 소득, 고용 상황, 주택 소유 여부 등 개인 정보를 등록하고 몇달을 기다렸다.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걸까. 지난달 25일 첫 기본소득이 입금됐다.

‘해밀턴 빈곤퇴치 센터’에서 주당 10시간을 일하는 그는 기존의 각종 수당보다 매달 543캐나다달러(약 47만4000원)를 더 지원받는다. 지난달 24일 센터에서 만난 그는 “14년 전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다”며 “이제 낡은 집도 고치고 텔레비전 수신료도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또 어린 시절 받은 바이올린 강습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온타리오주는 지난 6월부터 1인 가정 기준 연소득 3만4천캐나다달러(약 2983만원) 이하인 빈곤층 4000명을 대상으로 3년간 기본소득 지급 실험에 돌입했다. 대상자는 해밀턴, 선더베이, 린지의 18~64살 주민들 가운데 최근 1년 넘게 빈곤층으로 분류된 이들 중에서 선발했다. 매년 1인당 1만6989캐나다달러(약 1490만원), 부부는 2만4027캐나다달러(약 2108만원)를 받는다. 고용 여부와 관계없이 무작위로 선정했으나, 다른 수입이 발생하면 1캐나다달러당 50센트씩 수급액이 줄어든다. 기본소득은 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조건 없이, 현금 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이지만, 온타리오주 실험은 기본소득이 빈곤문제의 해결책이 될지 집중 관찰하기 위해 대상을 빈곤층으로 제한했다.

소피아가 사는 해밀턴 지역이 선정된 이유는 이렇다. 주도 토론토에서 60㎞가량 떨어진 이 지역은 미국의 ‘러스트 벨트’처럼 한때 철강, 기계, 자동차 등 제조업 지대로 호황을 누렸다.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고 더는 생계를 뒷받침하지 못하자 십수년 전부터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실제로 둘러본 거리엔 활기가 없고 빈 공장 지대는 지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적막했다.

빈곤 퇴치를 위한 온타리오 연합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존 클라크 대표, 활동가 요기 아차리아와 에이 제이(A.J. 위너스).
빈곤 퇴치를 위한 온타리오 연합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존 클라크 대표, 활동가 요기 아차리아와 에이 제이(A.J. 위너스).
해밀턴에서는 1000명이 실험에 참여한다. 온타리오주는 가난한 시민들이 기본소득을 어떻게 쓰는지 살펴보려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로봇으로 대체되는 미래에 기본소득이 어떤 역할을 할지 예측해보자는 취지도 있다. 시민단체 ‘빈곤 감소를 위한 해밀턴 회의’의 톰 쿠퍼 대표는 “기본소득은 일자리가 대체되는 과도기에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라며 “근로 의욕이 사라질 것이란 비판도 있지만, 오히려 노동자에게 정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피아는 심리적 효과도 크다고 했다. 그는 “각종 복지 혜택을 받을 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일하기 싫어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으로 취급됐다. 제대로 서류를 접수해도 80% 넘게 반려됐다. 내겐 수없이 거절당한 기억이 있다”며 “반면 기본소득은 무엇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돼 좋다”고 했다.

이곳에도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특히 다른 사회보장비나 수당은 폐지하는 이른바 ‘음의 소득세’ 구조로 설계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회사와 고용주의 임금 상승 유인을 상쇄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시민단체 ‘빈곤 퇴치를 위한 온타리오 연합’의 존 클라크 대표는 “이 실험이 저임금을 정당화할 수 있다”며 “기본소득으로 일원화된 복지 혜택은 사회안전망을 오히려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캐슬린 윈 온타리오주지사가 지난달 25일 토론토에 있는 주의사당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캐슬린 윈 온타리오주지사가 지난달 25일 토론토에 있는 주의사당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캐나다는 올해 실험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고민해왔다. 1974년부터 4년간 매니토바주 위니펙에선 1300가구를 대상으로 1년에 3300캐나다달러(현재 가치로 1만6500캐나다달러 상당)를 지급하는 실험 ‘민컴’이 시행된 바 있다. 의식주가 개선된 대상 가구들의 연간 1000명당 입원자 수가 실험 전보다 19.23명 감소했다. 이 무렵부터 “기본소득으로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이번 실험이 빈곤 지표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피터 밀친 주택·빈곤퇴치 장관은 “3개월마다 영양 상태와 병원 방문 횟수, 자녀 교육 성과 등을 개인별, 지역별로 측정한다”며 “각종 빈곤 퇴치책이 실패한 부분을 기본소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캐슬린 윈 주지사도 “기본소득은 빈곤을 근절하고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드는 계획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엔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주도 기본소득 실험을 주의회에 제안했다. 빈곤율 상위 20개 지역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이 빈곤층 고용과 주거 안정, 건강 문제의 ‘처방’이 될지 들여다보자는 취지다. 기본소득네트워크 캐나다지부의 실라 러게어 대표는 “사회적 불안이나 혐오 문제는 경제적 빈곤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기본소득이 최저 생계를 보장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시각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토론토·해밀턴/글·사진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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