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2일(12일) 워싱턴DC에서 애틀랜틱 카운슬과 국제교류재단이 공동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 기조연설에서 ‘조건없는 북-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포함한 대북 구상을 밝히고 있다. 워싱턴/ AFP 연합뉴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부 장관이 12일(현지시각)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기존의 대화 전제조건들을 일단 접고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틸러슨은 자신의 보스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나, 백악관은 “북한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해 여러 해석을 키웠다.
틸러슨 장관은 이날 워싱턴DC에서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과 국제교류재단이 공동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 기조연설이 끝난 뒤 문답에서 “우리는 북한이 대화할 준비가 되면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우리는 전제조건 없이 기꺼이 북한과 첫 만남을 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만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과 충분한 조율을 거친 발언이라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문턱’을 크게 낮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틸러슨의 발언은 지난달 29일 북한이 미 동부 해안까지 핵탄두를 실어날을 수 있는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한 지 2주 만에 나온 것으로, 북한의 핵무력 완성을 앞둔 위기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대 분수령이 될 수 있다.
틸러슨은 “일단 만나자. 그리고 당신(북한)이 원한다면 우리는 날씨 얘기를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흥미를 갖는다면 우리는 테이블이 사각형인지 둥근지도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소한 서로 얼굴을 보고 앉아야 우리가 향후 어떻게 일을 해나아갈지에 대한 로드맵을 펼치기 시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틸러슨은 “첫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외교적 노력들을 계속할 것”이라며 군사적 해법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또 “북한은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기를 원한다는 관점을 갖고서 대화 테이블에 나와야 한다”며 ‘한반도 비핵화’ 의지도 재확인했다.
하지만 “당신(북한)의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서 테이블로 나와야만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며 “북한은 거기에 너무 많이 투자했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그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은 미국과 북한이 가볍게라도 우선 대화를 시작하고, 이후 북핵 문제 해법을 논의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진일보한 제안으로 볼 수 있다. 틸러슨 장관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북한은 북한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틸러슨은 북한 쪽에서도 대화 준비가 됐다는 시그널을 보냈는 지 여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대화를 하려면 휴지기가 있어야 한다는 걸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며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북한이 일정 기간 핵 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는 게 유일한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날 틸러슨이 구체적인 기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60일 이상 도발하지 않아야 대화한다’는 것이 ‘틸러슨 구상’으로 불린다.
북한 핵 무기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감이 전례 없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라는 전제조건을 없앤 획기적인 대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얻은 발언인지가 확인돼야 한다. 틸러슨의 이 발언과 관련해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늦게 “북한은 일본·중국·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위험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며 “북한에 대한 대통령의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틸러슨 발언의 파급력을 완화시키려는 듯한 입장으로도 풀이된다.
틸러슨 장관은 대북 대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트위터에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글을 올린 바 있다. 최근에는 그가 연내에 경질될 수 있다는 미국 언론 보도도 나왔다.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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