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누가 고개를 숙일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전통적 우방의 사이좋은 대통령들이었다. 정실인사를 하고 비판적인 언론을 ‘적’으로 돌리며, 입이 거칠고 저금리를 좋아하는 ‘토건족’인 것도 서로 닮았다. 그런 두 사람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결투를 벌이면서 세계 정치·경제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터키에 구금된 미국인 목사가 풀려나지 않자, ‘배신 당했다’고 느낀 트럼프가 달러를 무기로 삼아 공격에 나섰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고,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터키의 위기가 신흥국과 유럽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지정학적 중요성 탓에 미국은 터키를 버리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트럼프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었다. 에르도안도 굴복하지 않고 ‘항전’ 의지를 불태운다. 그렇다고 60여년 된 군사동맹을 내팽개치기에는 양쪽 모두 잃을 게 너무 크다. 트럼프와 에르도안이 싸우는 뒷배경과 두 나라가 어떤 해법을 모색할지 살펴봤다.
군사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열린 지난 7월11일 벨기에 브뤼셀. 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두 스트롱맨은 정상들의 무리에서 조금 뒤로 처진 채 나란히 걸었다. 밀담을 나누는 듯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사이 좋은 친구들 같았다. 한 해 전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러 이동하다가 몬테네그로의 총리, 두스코 마르코비치를 확 밀치고 앞줄에 선 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딴청을 피우던 트럼프의 무례한 행동에 전 세계가 놀랐던 터라, 올해 함께 걷는 둘 사이가 더 각별해 보이기도 했다.
‘닮은 꼴’ 스트롱맨
트럼프는 지난 20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나는 대통령(에르도안)과 매우 좋은 관계였다. 그와 아주 잘 지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에르도안이 장기집권 할 수 있는 길을 연 대통령제 개헌 국민투표에서 승리하자 트럼프는 축하전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부정투표 의혹이 일었고, 유럽 국가들은 에르도안에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때였다. 에르도안은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뒤 벌어진 반트럼프 시위에 대해 “민주주의를 무시한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트럼프와 에르도안은 여러모로 닮았다.
맏사위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지난 6월 대통령에 재선된 뒤 에르도안은 경제사령탑인 재무장관에 베라트 알바이라크(40)를 임명했다. 그는 2004년 에르도안의 큰딸 에스라(35)와 결혼했으며 미국 뉴욕의 페이스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하고 건설·에너지 관련 기업인 칼릭 홀딩스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2006년 귀국해 2015년 의회에 들어간 뒤 에너지부 장관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사위를 재무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에르도안은 통화·재정 정책을 컨트롤하겠다는 신호를 보냈을 뿐 아니라 ‘왕조 국가’를 준비하겠다는 의도도 내보였다”고 평했다.
트럼프의 ‘정실 인사’를 대표하는 인물도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37)다. 그는 트럼프 정부 출범 때부터 백악관 선임고문을 맡아 정권의 실세로 통하고 있다. 유대인인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중동정책도 주무른다. 2009년 트럼프의 큰딸 이방카(37)와 결혼했다. 트럼프의 절친이자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은 “트럼프의 임기 동안 쿠슈너는 백악관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에르도안과 트럼프는 과학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한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주장한다. 어린이에 대한 백신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에르도안은 지난해 고교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기로 하고,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한 교과과정을 승인했다.
‘위대한 미국의 부활’과 ‘위대한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스트롱맨(독재적 성향의 지도자)답게 두 사람은 비판을 못견뎌 한다.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시엔엔> 등 “언론들은 국민의 적”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기사들을 모두 “가짜 뉴스”라고 매도한다. 에르도안은 언론사들에 경찰을 보내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2016년 7월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 폐쇄한 언론사가 200곳에 이른다. 에르도안을 비난해 대통령 모욕죄로 처벌된 사람만 2000명이 넘는다.
둘 다 입이 거칠고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한다. 트럼프는 백악관 대외협력국장에서 해임된 뒤 자신과의 관계를 담은 책을 낸 흑인 여성 오마로사 매니골트(43)를 “개”라고 불렀다. 지난 1월에는 백악관에서 열린 이민정책 관련 회의에서 “우리가 왜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것을 원하나. 거지소굴(shithole) 국가에서 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줘야 하나”고 언급했다. 에르도안은 2016년 10월 이라크 북부에 침입한 터키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이라크 총리에게 “내 대화 상대도 아니고 내 수준도 아니다”며 “당신 주제부터 먼저 알아라”고 조롱했다. 터키 장관들의 입국을 막은 네덜란드에 “나치의 잔당”이라고 비난을 퍼부어 외교 갈등으로 비화했다. 2014년 5월 소마 탄광 폭발사고로 300여명의 광부들이 숨진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 앞에서 “업무상 재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다른 나라에도 이런 사고는 있다. 영국에선 1862년 204명, 1866년 361명, 1894년 290명이 죽는 사고가 있었다”고 말해, 공감능력 부족을 과시했다. 분노한 유가족들이 몰려들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슈퍼마켓으로 도망쳤다. 에르도안은 “적어도 아이 3명을 낳을 것을 권장한다” “어머니 대신 일로서 성공하려는 여성은 불충분한 존재”라고 말해 여성계의 비판을 받았다.
에르도안과 트럼프는 비도시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 등 대도시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터키에서 지난해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에서도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에르도안 찬성표가 많았지만 수도 앙카라와 최대도시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 에게해 연안 도시지역에서는 반대표가 많았다.
둘 다 ‘토건족’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업자에서 성공해 갑부가 됐고, 에르드안은 외국에서 자금을 끌어와 대규모 건설 사업에 쏟아부으며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래서인지 저금리 정책을 쓰라고 서슴지 않고 중앙은행을 압박한다. 에르도안은 한발 더 나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통화정책으로 국민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는가?”라며 “바로 대통령한테 물을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통화정책에 영향을 끼친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줘야 한다”고 말한다. 에르도안은 스스로를 “금리의 적”이라고 칭하며 “금리는 모든 악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고금리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라는 매우 기괴한 경제관을 갖고 있다. 저금리가 물가상승을 부르고, 물가가 뛰면 고금리 정책을 써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경제상식이다. 트럼프도 최근 제롬 파월 연준(Fed) 의장의 금리정책을 대놓고 비판했다. 그는 “나는 그(파월)가 금리를 올리는 것이 달갑지 않다. 전혀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파월은 트럼프가 연준 의장에 임명한 사람이다. 미국 대통령이 연준의 금리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터키 이스탄불 시내의 환전소에 지난 17일(현지시각) 달러와 유로에 대한 터키 리라 환율이 표시돼 있다. 터키가 구금된 미국인 목사를 석방하지 않아 미국이 경제 보복에 나서 리라 가치가 급락하는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스탄불/로이터 연합뉴스
배신 혹은 오해
이렇게 닮은 두 친구, 트럼프와 에르도안이 크게 틀어졌다.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라는 게 트럼프의 주장이다.
나토 정상회의 때 따로 만난 자리에서 에르도안이 이스라엘에 억류된 터키 여성 에브루 오즈칸(27)이 풀려나도록 도와달라고 트럼프한테 요청했고, 오즈칸이 풀려나면 에르도안은 그 대가로 터키가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50) 목사를 풀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오즈칸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대원에게 500달러를 주는 등 하마스를 지원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스라엘은 7월15일 오즈칸을 풀어줬고, 트럼프가 풀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터키는 브런슨을 풀어주지 않고 가택연금했다. 1993년 터키로 간 브런슨은 이즈미르에 정착했고 2010년부터 작은 교회를 운영했다. 2016년 7월 쿠데타가 실패한 뒤 한창 숙청작업이 진행되던 같은해 10월 터키가 테러단체로 규정한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지원하고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됐다. 트럼프는 “그들은 그(브런슨)를 간첩이라고 하지만 내가 더 간첩이다”는 트위트를 날리기도 했다.
에르도안의 얘기는 다르다. 트럼프와 ‘맞교환 협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국영방송에 나와 “미국인들한테 그들이 에브루 오즈칸의 석방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리고 그 대가로 브런슨을 풀어줄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브런슨을 협상 주제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착각했다는 주장이다. 에르도안이 브런슨과 맞교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다. 지난해 9월 그는 “그들(미국)은 ‘목사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우리한테도 한 명의 목사가 있다. 그를 우리한테 넘겨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브런슨)를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 에르도안이 목사로 칭한 ‘그’는 1999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주에 살고 있는 펫훌라흐 귈렌(77)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가운데) 터키 대통령이 지난 4월 앙카라에서 하산 로하니(왼쪽) 이란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의를 열어 시리아 내전 종식 방안 등을 논의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앙카라/타스 연합뉴스
두 명의 성직자
브런슨과 귈렌. 트럼프와 에르도안이 이들한테 집착하는 까닭이 있다.
브런슨은 미국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목사다. 복음주의 개신교도는 미국에서 가장 큰 종교 집단이다. <퓨리서치센터>가 2014년 미국 성인 3만5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복음주의 개신교가 25.4%, 가톨릭 20.8%, 주류 개신교 14.7%, 기타 종교 5.9% 등으로 나타났다. 미국 인구의 4분의 1이 복음주의 개신교도다. 2016년 11월 치러진 미국 대선 출구조사를 보면, 복음주의 개신교도의 81%가 트럼프 후보한테 투표했다. 이들이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층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대통령직은 꿈도 못꿨을 것이다. 트럼프가 브런슨 석방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도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짙다.
미 국무부에서 터키 관계를 다룬 경험이 있는 어맨더 슬롯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브런슨 사건이 공화당 진영 내 복음주의자들을 단결시키는 슬로건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브런슨을 해외에 파견한 복음주의 장로교회 교단 소속이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복음주의자다. 에르도안은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말하노니, 부끄러운 줄 알라, 부끄러운 줄 알라. 그대들은 한 명의 성직자와 나토의 전략적 동반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에르도안이야말로 ‘한 명의 성직자’에 집착해 전략적 동맹을 해치고 있다는 게 미국의 시각이다. 정적인 귈렌에 사로잡혀 물불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귈렌은 온건한 이슬람주의 사상가이자 교육운동가다. 2008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실시한 ‘세계 최고 100대 지성’ 투표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노엄 촘스키, 움베르토 에코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수백만명의 추종자를 거느린 귈렌은 한때 에르도안과 뜻을 같이했다. 에르도안이 창당한 정의개발당(AKP)이 2002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할 때 귈렌 추종자들이 대거 입당했다. 귈렌 추종자들은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계 등에 많았다. 그러다가 2013년 경찰과 검찰의 반부패 수사로 에르도안 아들의 비리 혐의가 드러나는 등 대규모 부패 사건이 터지면서 에르도안과 귈렌 세력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에르도안은 귈렌 추종자들이 반부패 수사를 구실로 정부를 공격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공직에서 쫓아냈다. 2016년 쿠데타가 발생하자 에르도안은 곧바로 쿠데타의 배후로 귈렌을 지목하고 미국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귈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에르도안이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쿠데타 시도 뒤 에르도안은 군대와 경찰, 사법부, 언론계, 학계 등에서 귈렌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닥치는대로 잡아들였다. 유엔은 지난 3월 에르도안 정부가 16만명을 구금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공무원들을 해임했다고 밝혔다. 이런 행태는 러시아 혁명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반대파를 숙청하고,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그의 정적인 레온 트로츠키한테 돌린 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에르도안에게 귈렌은 스탈린에게 트로츠키와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 반혁명 분자들”이 도처에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대숙청을 자행했고, 에르도안은 “귈렌주의 테러 분자들”이 정부 전복을 꾀한다고 이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미국은 귈렌이 연루된 증거가 없다며 그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지난 18일 앙카라에서 열린 정의개발당(AKP) 회의에 참석해 터키 경제에 대한 외부의 공격에 맞서 싸우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있다. 앙카라/신화 연합뉴스
뿔난 트럼프
자신은 약속을 지켰는데 에르도안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한 트럼프는 분개했다. <거래의 기술>이라는 책을 쓰고 , 스스로 ‘협상의 달인’이라고 자랑했는데 한방 먹은 꼴이 됐기 때문이다. 브런슨의 석방을 거부하자 지난 1일 터키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다. 트럼프는 10일 트위터에 “터키의 리라화 가치가 우리 달러에 비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터키산 알루미늄에 20%, 철강에는 50% 관세가 붙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터키와 관계가 좋지 않다”는 글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트럼프가 관세를 2배로 올리며 경제 제재에 나서겠다고 한 이날 리라는 장중 한때 23%나 폭락하기도 했다. 이후 리라 환율은 달러당 7.2리라까지 치솟았다가(리라 가치 하락) 며칠 뒤 달러당 5.8리라 선에서 안정을 찾았다.
리라 가치 폭락으로 세계 금융시장은 출렁했다. 외화부채가 많은 터키의 위기가 그러잖아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자금이 빠져 나가 통화가치 하락을 겪고 있는 신흥국들에 타격을 줄 것이고, 터키에 자금을 대출해준 유럽의 은행들로도 위기가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터키 금융위기는 1998년 인도네시아, 타이 등지에서 발생했던 위기를 재연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에르도안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은 전략적 동반자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맹비난하며, 국민들에게 가지고 있는 달러와 유로를 은행에 팔아달라고 요청했다. 또 “그들(미국)에게 아이폰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삼성이 있다”며 미국 전자제품 불매를 촉구했다. 에르도안은 2016년 쿠데타를 진압할 때는 아이폰의 영상통화인 페이스타임을 이용해 지지자들에게 거리에 나서 쿠데타 군에 맞서라고 호소했었다. 터키도 미국산 승용차와 술, 담배, 화장품, 쌀, 석탄 등의 관세를 2배로 올리며 맞불을 놨다.
트럼프는 “양보는 없다”고 했고, 에르도안은 “무릎꿇지 않겠다”고 맞서고 있다. 둘다 스트롱맨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국제 정치·경제 위기를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2018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는 “카리스마를 지닌 스트롱맨들의 정치가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중국, 일본, 러시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필리핀 등에서 변주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며, 스트롱맨들의 다툼을 올해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16일 백악관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왼쪽) 터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악수를 청하며 다정하게 손을 내밀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경제성장 힘입어 장기집권
에르도안은 트럼프의 경제 보복을 “경제 쿠데타 시도”라고 규정했다. 그러잖아도 위태위태하던 때 트럼프가 자신을 더 궁지로 몰아넣은 탓이다. 에르도안은 경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집권에 성공했고, 경제성장을 통해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켜 온 터였다.
경제가 파탄났던 터키는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시장 개방 등을 조건으로 190억달러를 받았다. 경제난이 에르도안에게 2002년 총선 승리를 안겼다. 리라는 1960년대에는 1달러가 9리라 정도에 거래됐는데, 2001년에는 1달러가 무려 165만리라에 거래될 정도였다. 에르도안은 2005년 리라에서 ‘0’을 여섯 개나 없애 화폐의 액면가를 100만분의 1로 낮추는 화폐단위변경(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는 등 물가안정을 꾀했다. 30여년만에 물가상승률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노동법도 개정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강화했으며, 주 4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고 연장근로가 한 해 270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1923년부터 2002년까지 80년 동안 6000㎞의 2차선 도로가 건설됐으나, 에르도안 총리 집권기에만 1만3500㎞의 고속도로가 건설됐다. 공항도 26곳에서 50곳으로 늘었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2001년 -5.9%에서 2002년 6.4%, 2003년 5.6%, 2004년 9.6%로 반등했다. 2009년 세계 금융위기 때 -4.7%로 떨어지긴 했지만 2010년 8.4%, 2011년 11.1%를 기록하는 등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에르도안은 의원내각제였던 터키에서 세 차례나 연거푸 총선에서 승리해 터키 최초로 3선 총리가 됐다. 터키의 아버지(아타 튀르크)인 무스타파 케말(1881~1938) 이후 터키를 가장 크게 변모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성의 히잡 착용을 허용하는 등 이슬람주의 성향도 케말이 확립한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반감을 갖고 있던 서민층과 농촌지역의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요인이었다.
에르도안은 4연임을 금지한 당헌으로 더 이상 총리를 할 수 없게 되자 2014년 ‘바지 사장’ 총리를 앉히고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 대통령제로 헌법을 바꿨다. 새 헌법에 따라 지난 6월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된 에르도안이 중임에 성공하고, 임기 마지막 해에 조기선거를 한다면 2033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다.
자초한 위기
에르도안의 끝없는 권력욕이 그의 승승장구를 뒷받침했던 경제에 타격을 가했다.
터키중앙은행 자료를 보면, 지난해 2월 소비자물가는 10.13% 뛴 이후 7월 9.79%를 빼고는 매달 두자릿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10~11% 선에 머물던 상승률은 올 6월 15.39%, 7월 15.85%로 껑충 뛰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자금이 빠져나가고 리라화 가치는 계속 하락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에르도안은 “고금리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라며, 저금리를 유지해 건설경기를 부양하기를 바랐다. 올 6월 대선을 앞두고 금리인상을 억눌렀다.
리라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중앙은행은 5월과 6월 세 차례 기준금리(현재 17.75%)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에르도안이 중앙은행 통화정책에 개입해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고 있던 터에, 맏사위를 재무장관에 임명하자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중앙은행과 다른 공공기관의 독립성 침해에 대한 인식이 투자자들의 우려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터키 신용등급을 낮췄다. ‘일인 지배체제’를 강화할수록 성장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면 경제정책이 더 꼬여가는 길을 에르도안이 밟고 있다는 진단이 많다.
외화 부채와 무역 적자도 위기 요인이다. 터키 재무부는 올 3월말 기준 대외 채무가 4667억달러, 국내총생산(GDP) 대비 52.9%에 이른다고 밝혔다. 채무 규모는 6월말 기준 외환보유액 984억달러(금 보유량 포함)의 5배가 넘는다. 무역 적자도 지난해 771억달러로 한 해 전보다 37.5% 늘어 적자 폭이 커졌다. 수출액(1571억달러)의 절반 가까이 된다. 무역 적자는 커지고 외국에서 돈을 빌려 토목·건설 공사를 하다보니 대외 부채가 불어난 것이다.
에르도안은 상황을 자신에 유리하게 바꾸는데 도가 튼 인물이다. 그는 “2016년 쿠데타에 실패한 세력들이 경제 전쟁으로 터키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 실정을 미국 등 외부의 공격으로 돌리며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
터키와 미국은 그동안 몇 가지 사안을 놓고 충돌해 왔다. 미국은 이슬람국가 격퇴 작전에서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를 지상군처럼 활용하며 지원했으나, 터키는 인민수비대가 쿠르드노동자당와 연계된 조직이라고 주장하며 반발해 왔다. 에르도안은 또 2016년 쿠데타를 진압할 때 유용한 정보를 준 러시아에 점점 더 다가갔고, 러시아·이란과 함께 시리아 내전 종식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터키가 러시아제 S-400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자, 미국 의회는 F-35 스텔스 전투기의 터키 수출 계획을 중단시켰다. 터키 국영은행 할크방크의 부사장 등이 이란이 경제 제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운 혐의로 미국 법원에서 지난 5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도 두 나라의 갈등을 불렀다.
에르도안, 고개 숙일까
에르도안은 “새 동맹을 찾겠다”고 했다. 그가 믿는 구석은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이다.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터키는 동서 냉전 기간에 소련을 봉쇄하는 핵심 거점이었고, 지금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곳이다. 나토 회원국들 가운데 군사력이 미국에 이어 두번째다. 미국은 터키 남부의 인지를리크 공군기지와 에게해 인근의 이즈미르 공군기지 등 2개의 기지를 두고 있다. 특히, 인지를리크 기지에는 전술핵무기를 가져다 놓을 정도로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 50여기의 B-61 핵폭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지를리크 기지는 미군이 이슬람국가(IS)와 싸울 때도 군사기지 구실을 했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애런 스테인 선임 연구원은 “트럼프는 에르도안한테 친한 척 굴었는데 브런슨이 석방되지 않아 충격을 받았고, 에르도안은 어떤 미국 대통령도 터키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라는 데 베팅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에르도안은 ‘익숙한 내기’를 했는데, 트럼프는 전혀 새로운 상대였다는 뜻이다.
결국 에르도안이 고개를 숙여야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새로운 술탄: 에르도안과 현대 터키의 위기>의 저자로 워싱턴연구소의 터키연구프로그램 책임자인 소너 카갑타이는 “에르도안이 브런슨을 석방할 때까지 긴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에르도안은 트럼프에 항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 터키는 브런슨 사건은 “법적 문제”라며 ‘사법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터키 법원의 ‘독자적’ 결정으로 브런슨을 석방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체면을 세울 수 있다. 카갑타이는 “두 나라의 군사·정보 협력은 여전히 끈끈하다”고 했다. 미국-터키 동맹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해 5월 백악관에서 열린 미-터키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에르도안을 앞에 두고 “미국과 터키는 수십년 동안 친구이자 동맹이었다. 전쟁에서 터키인들의 용기는 전설적이다”며 “한국전쟁 때 터키군은 미군과 함께 용감하게 싸웠으며 우리는 그들이 한 일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용맹한 전우를 팽개치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
황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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