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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남·북·미와 피로 얽힌 베트남, 평화시대 여는 장소 될까

등록 2019-02-16 09:00수정 2019-02-17 15:07

[토요판] 특집
2차 북-미 정상회담과 베트남

27일 북-미 정상회담 열리는 하노이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 됐던 도시
베트남, 미와 20년 전쟁 치렀지만
가장 먼저 냉전에 의한 분단 끝내

베트남전은 미국이 패배한 첫 전쟁
미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 남겨
중국 팽창 두려움으로 전쟁 결정
베트남-중국 갈등 제대로 못 읽어

한국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1만명이 넘는 군인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1967년 1월9일 한국군의 맹호 8호 작전으로 포로가 된 베트콩.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7권>
한국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1만명이 넘는 군인을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다. 1967년 1월9일 한국군의 맹호 8호 작전으로 포로가 된 베트콩.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7권>
▶오는 27~28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미국과 베트남은 20년간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 남한과 북한이 모두 파병을 하는 등 네 나라는 ‘피의 역사’로 얽혀 있다. 냉전시대, 비극적 열전이 벌어졌던 베트남에서 북-미는 냉전을 마무리하는 역사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까. 북-미 정상회담의 하노이 개최 의미에 대해 <베트남전쟁>의 저자이자 한국 현대사 전문가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분석했다.

“1967년 10월26일, 군과 민간인이 이날 여기 옌푸(YÊN PHỤ) 전기 공장에 (폭탄을) 떨어뜨린 10대의 비행기 중 한 대의 조종사인 미국 해군 항공대 소속 존 시드니 매케인 소령을 수도 하노이 쭉박호(HÔ TRÚC BẠCH)에서 생포했다.”(하노이 쭉박호 근처의 비석)

얼마 전 고인이 된 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시드니 매케인 소령은 포리스털 항공모함에서 1967년 22번의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해 10월26일 매케인은 하노이시 중심부의 공장 지대를 폭격하는 임무를 띠고 A-4 스카이호크를 타고 출동했다가 소련제 SA-2 지대공미사일을 맞아 추락하게 된다. 매케인은 비행기로부터는 탈출했지만, 곧 베트남군에 체포되었고, 하노이의 ‘힐튼호텔’로 불리고 있던 호알로 감옥에 수용되었다.

미국을 상대로 20년간 ‘제2차 독립전쟁’(베트남전쟁·1955~1975)을 벌인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미 공군과 해군의 폭격 목표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의 분단선인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미 지상군이 북진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북베트남의 전 지역은 미국의 폭격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년에 걸친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하노이가 오는 27~28일 열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장소로 결정되었다. 베트남에서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다양한 의미와 역설을 보여준다. 밀라이학살(1968년 3월16일 남베트남 밀라이에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학살)로 대표되는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기억한다면, 미국이 적대국인 북한과의 회담 장소로 베트남을 선택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베트남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베트남은 한국과 함께 냉전 시기 열전이 있었던 곳이다. 미국은 20년에 걸쳐 베트남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옆에는 한국군이 있었다.

20년의 전쟁을 거쳤지만, 베트남에서는 냉전이 종식되었다. 1945년 이후 분단되었던 독일과 한국, 베트남 중 베트남은 가장 먼저 냉전에 의한 분단을 끝냈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아직도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냉전이 가장 먼저 끝난 곳에서 아직도 냉전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과 40년 전만 하더라도 적대국이었던 곳에서 미국이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키는 회담을 한다는 것은 한편의 역설이겠지만, 이와 동시에 베트남이라는 장소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가 될 만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오는 27~28일 미국과 북한의 제2차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인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모습. 지난 1월 공산당 포스터가 걸린 거리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지만 이후 수교를 맺었고,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AP 연합뉴스
오는 27~28일 미국과 북한의 제2차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인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모습. 지난 1월 공산당 포스터가 걸린 거리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지만 이후 수교를 맺었고,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AP 연합뉴스
베트남과 한국, 비슷하지만 다른

“사해가 모두 형제니

담소하는 곳이 곧 나의 고향.

새로 알게 된 즐거움 기뻐했거늘

긴 이별의 슬픔 어이 견디랴.

훗날 남과 북에서 서로 그리워할 때

구름과 물 참으로 아득하겠지.”

15세기 중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서거정이 베트남의 사신 완문질(阮文質), 완위(阮偉)와 화답한 시다.(박희병, ‘조선 후기 지식인과 베트남’, 161~162쪽에서 재인용) 17세기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과 아홉 수의 시를 주고받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직접 베트남 사신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베트남에 훌륭한 유학자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숙명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두 나라는 중국이라는 세계 최강의 강대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였다. 두 나라는 생존을 위해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위대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과 베트남에서는 소중화사상이 나타났다. 명이 멸망함으로써 중국 내에서 유학의 전통이 끊어지고, 그 명맥이 조선과 베트남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주도권이 약화되는 시점에서 베트남은 프랑스의,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두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독일 같은 전범국가가 아닌데도 분단되었다. 세계 냉전의 중심 무대는 동서로 나뉜 유럽이었지만, 변방인 한국과 베트남에서 열전이 일어났다. 한국은 중국과 소련, 그리고 베트남은 중국의 이웃국가이기에 공산주의 봉쇄를 위해 제국의 대리전을 치러야만 했다.

이렇게 한국과 베트남은 공통점이 많다. 베트남에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들이나 베트남에 투자를 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 역사적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그런가? 하지만 두 나라는 다른 점도 많다.

“안남과 일본은 스스로 황제를 칭한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 이종휘의 <수산집>에 있는 글귀다.(박희병, 위의 글, 172쪽에서 재인용) 조공국의 왕은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형식상이기는 했지만, 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 이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대내적으로는 황제의 호칭을 썼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국이었음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두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에 의존함으로써 다른 한쪽을 견제해야만 생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한쪽에는 중국이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는 베트남보다 약한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있었다.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대장이 될 수는 없지만, 인도차이나에서 대장이 되려면 중국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중국에 맞대응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이 되어야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베트남에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착한 이웃국가였다. 조공관계만을 유지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경쟁했다. 조공관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중국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특히 19세기 서양 세력이 몰려올 때 조선과 베트남의 외교정책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과 베트남의 길항관계는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는 핵심 고리다. 이 지점에서 미국의 오해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도와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중략) 한국이 뭘 잘못했겠어요? 그저 미국이 하라는 대로 따라한 것뿐이죠.”(2006년 하노이대학 한 역사학과 교수와의 대담)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과 달리 중국과 베트남은 결코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 기간에도 중국은 베트남에 많은 물자를 지원해주었지만, 베트남은 중국에 많이 섭섭해했다. 1954년 제네바에서 열강들은 베트남의 분단을 결정했다.(제네바합의) 여기에서 호찌민은 북위 16도선에서의 분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17도선을 고집했고, 중국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1962년 중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라오스에 대한 평화협정에 동의했다. 만약 라오스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1960년대의 전쟁터는 베트남이 아니라 라오스가 될 수도 있었다.

1968년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북베트남에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반대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베트남은 반대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쟁의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닉슨의 방문을 허용했고, 베이징에서 닉슨과 마오쩌둥은 마오타이로 건배를 했다. 더 이상 북베트남을 돕지 않겠다는 중국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미국은 파리에서 북베트남, 그리고 베트콩과 평화협정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중국은 1979년 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등을 이유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만약 미국이 중국과 베트남의 이런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베트남전쟁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남한은 미국 요청으로 10년간
31만명 파병해 5천명 이상 사망
북한은 미그기 조종사 87명 파견

남에 ‘안보위기’ 만들어 간접지원

80년대 개방정책 시장경제 수용
95년 미와 수교 맺고 제재 해제
‘미군 유해 송환’이 수교 출발점

북한도 작년 합의문에 명시해

부시, 2006년 하노이서 종전 제안
이번에는 새 시대 열 수 있을까

베트남전쟁, 미국의 오판과 트라우마

“국가가 없다는 걸 상상해 보세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일도, 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종교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사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던 가수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의 가사다. 미국은 건국 이후 참전한 전쟁 중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했고,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패배했다. 베트남전쟁은 거대한 반전운동의 흐름과 함께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미국은 왜 베트남에 개입했고, 왜 베트남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까? 이 해답의 중심에는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와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과 베트남, 그리고 중국이 얽힌 복잡한 국제관계는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당시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밝혔던 바와 같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도미노 현상’(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인접 나라들도 차례로 공산화되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동남아시아에는 베트남 외에도 타이와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공산화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경제적 배후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힘이 팽창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필요했다. 화교는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 공산당의 핵심적인 세력이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집단학살(인도네시아 군부가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대상은 주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화교계 공산당원들이었다. 인도네시아 학살 사건에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을 더 어렵게 한 것은 1964년 중국의 핵개발이었다. 미국은 1950년부터 1953년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사적 힘을 확인하였다. 그런 중국이 핵을 개발하였고, 그 힘이 동남아시아로 확대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에 이어 동남아시아 시장마저도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했고, 이는 20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만약 미국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의 길항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굳이 베트남전쟁이라는 늪에 빠질 필요가 있었을까?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고 한들, 중국과 베트남이 서로 협력해서 동남아시아 전체로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을까?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 그리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남중국해에서의 갈등을 고려한다면,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더라도 중국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이 베트남전쟁 기간 중 가장 당황했던 푸에블로호 사건(1968년 1월23일 북한 원산 근처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된 사건) 때 북한과 소련의 관계를 오판했던 것처럼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미국의 잘못된 판단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통해 세계사적 오명을 남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다.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는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9년 6월 베트남에서의 미군들 모습. 위키피디아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다. 베트남전쟁의 트라우마는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9년 6월 베트남에서의 미군들 모습. 위키피디아
“나는 전우로서 이곳에 왔습니다. … 나의 생애는 지난 2~3년간 큰 변모를 보였는데 그것은 내가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미국 정부의 위선과 범죄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972년 7월8일 하노이를 방문한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 제인 폰다가 했던 말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까? 정글이라는 지형적 요인과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저항운동에 익숙한 베트남 사람들의 능력도 중요한 요인이었겠지만, 미국이 한국전쟁으로부터 입은 상처 역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지상군이 왜 17도선을 넘어 북진하지 않았는가의 문제는 베트남전쟁의 결과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은 성공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유엔은 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회복한다는 유엔군의 목표를 수정하여 한반도 전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이 개입한 것이다. 미국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미군은 20년간 일본과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추운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해왔던 중국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철군까지 고려했고, 하와이 근처의 섬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수립할 가능성까지도 고려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17도선 이북에 대해 폭격은 했지만, 지상군은 북진을 하지 못했다. 중국이 한반도에서처럼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개입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때 입은 피해를 또 한번 당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지상군이 북진을 할 경우 실제로 중국이 참전했을 가능성을 두고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미국 정부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만 했다.

문제는 참전한 미군들이었다. 이들은 군인으로서 참전했지만, 이들의 역할은 베트남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일이었다. 군인이 경찰 역할을 한 것이다. 군인에게 목표가 없다는 것은 곧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전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군 내에서의 상관 살인, 마약, 그리고 반전운동에 관한 연구라는 점은 당시 미군들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6만명 가까운 군인들이 전사했다.

남북한 모두 개입한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에는 남한과 북한이 모두 개입했다. 남한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1만명이 넘는 군인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한국 정부의 기록으로는 5008명이 사망했고, 베트남 정부의 기록으로는 5000명 이상의 베트남 양민이 한국군에게 학살되었다. 한국군의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지역에는 예외없이 추모비와 증오비가 서 있다. 한국군 실종자의 유해가 아직도 베트남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1972년 미국이 본격적인 철군을 시작한 이후에는 한국군의 수가 미군의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1972년 한 해만 놓고 본다면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969년 8월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습. 이 회담 한달 전인 7월25일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 아시아에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8권>
베트남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인 1969년 8월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습. 이 회담 한달 전인 7월25일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 아시아에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8권>
북한은 북베트남 편에 서서 87명의 미그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정비사 2명을 포함해 14명이 전사했고, 이들을 위한 묘지가 하노이에 있다. 북한은 직접적인 파병이나 군사지원보다도 한반도에서 안보위기를 만들어 북베트남을 돕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에 안보위기가 발생한다면, 더 이상의 한국군 파병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그리고 같은 해 11월의 울진·삼척 공비침투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한국군의 증파를 요청할 수 없었다. 북한의 전략은 성공했고, 북베트남과 북한의 동맹관계는 더 굳건해졌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었던 호찌민과 김일성의 비슷한 성격이 긴밀한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엇갈린 남북한과 베트남의 관계는 1990년대에 들어서 다시 역전이 되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으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전 국왕이 북한에 거주하면서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남한과 베트남은 1992년 수교를 맺으면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했다. 북한이 1990년대 후반 ‘제2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베트남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아 북한이 섭섭해했다는 근거없는 소문도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2013년 11월26일 보도한, 북한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 호찌민 주석을 만나는 모습. 이 사진은 평양 경상유치원 호지명(호찌민)반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조선중앙통신>이 2013년 11월26일 보도한, 북한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 호찌민 주석을 만나는 모습. 이 사진은 평양 경상유치원 호지명(호찌민)반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2000년대 와서는 남북한 모두가 베트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남한의 최대 투자처다. 동남아시아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동맹국은 베트남이다. 북한이 베트남을 제2차 북-미 회담의 장소로 수용한 것도, 남한이 이에 대해 큰 비판을 하지 않은 것도 베트남과의 관계에서 남북의 엇갈림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미국·베트남의 관계 정상화, 북한도?

2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내고 미국과 베트남이 다시 수교하는 데는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하면서 종전과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은 미국의 경제제재 보복과 캄보디아 점령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베트남 정부는 1986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유사한 도이머이 정책을 실시했고,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1995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경제제재도 해제되었다.

베트남과 미국의 수교는 전쟁 때 행방불명된 미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2018년 6월12일 제1차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문 속에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유해 송환이 명시되어 있었던 것도, 베트남과의 수교 과정에서 유해 송환이 첫 출발점이 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북한도 베트남과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인가?

베트남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과의 수교는 경제적인 목적이 가장 컸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측면과 함께 군사안보적인 측면에서 베트남의 존재가 중요했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중 북한과 함께 군사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국가이다. 베트남이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이, 미국의 동남아시아 정책에는 걸림돌이 되지만 군사안보적으로 중국 영향력의 확대를 차단한다는 목적에서는 유용할 수 있었다.

베트남과의 파트너 관계를 통한 중국 봉쇄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더더욱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베트남에 더더욱 접근하게 되었고, 이와 반대로 중국은 이를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서 베트남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2006년 11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북한에 대해 중요한 제의를 했다. 북한이 모든 핵프로그램을 중단할 경우 한국전쟁의 완전한 종료(종전)를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은 이미 그해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평화협정 체결을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고, 중국 정부는 탕자쉬안 국무위원(부총리급)을 평양에 보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북한 계좌가 동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평화협정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같은 해 10월9일 핵실험을 강행했고, 부시 행정부는 미 정부 내 안보라인의 핵심을 교체한 후 하노이에서 ‘핵 포기 시 평화체제 약속’이란 당근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는 이듬해인 2007년 베이징 6자회담의 2·13 합의와 10·4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6월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한 뒤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EPA 연합뉴스
지난해 6월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한 뒤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EPA 연합뉴스
2019년의 베트남은 2006년과는 수순이 다르다. 시작은 2018년 2월 평창겨울올림픽이었고,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 먼저 개최되었다. 그리고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을 고려한다는 구절을 합의문에 삽입했다. 9월18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이제 오는 27일 두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그리고 그 장소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종전선언을 제안했던 하노이다.

한국에서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1954년 열린 제네바회담에서 한국의 평화적 해결책은 찾지 못한 채 베트남 분단을 결정했던 미국이 이제 냉전이 종식된 베트남에서 한반도의 냉전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북-미 정상회담을 연다. 베트남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불행한 과거를 한국과 베트남은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이제 한반도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40년 전 냉전이 끝난 곳에서 이제 한반도의 냉전까지 완전히 끝낼 수 있을까? 아니면 중국 봉쇄를 위한 미국의 베트남 접근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또 다른 냉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그 장소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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