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7 11:30
수정 : 2019.03.1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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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 아닌 날들>의 ‘북 콘서트’를 하기 위해 지난 9일 서울 대학로 이음 책방을 찾은 재일동포 황보강자(왼쪽)씨와 박리사씨. 사진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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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북콘서트’ 연 재일동포 황보강자·박리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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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 아닌 날들>의 ‘북 콘서트’를 하기 위해 지난 9일 서울 대학로 이음 책방을 찾은 재일동포 황보강자(왼쪽)씨와 박리사씨. 사진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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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역사는 많이 기록됐지만, 여성의 역사는 없어요. 1991년 12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처음 실명 공개한) 김학순 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서 처음 강연회를 연 것도 우리 단체예요. 이전부터 계속 여성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이 나올 수 있던 거예요.”
지난 9일 오전 11시 서울 대학로의 이음 책방. 자이니치(재일동포) 2.5세인 황보강자(61)씨가 일본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란 숙명을 지고 살아온 여성 22명의 사연을 모은 책 <보통이 아닌 날들>(사계절 펴냄)이 나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탓인지, 경상도 사투리가 묘하게 섞인 황보씨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이니치·오키나와·아이누 등 22명
구술 형식으로 2016년 일본에서 출간
최근 한국어판 ‘보통이 아닌 날들’ 펴내
“아직도 용기 필요해 ‘가명’으로 소개”
간사이지역 동포여성모임 ‘미리내’ 활동
1991년 김학순 할머니 강연 계기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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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갓 태어난 황보강자씨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사진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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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8일 출간된 <보통이 아닌 날들>은 일본 사회 내 대표적인 소수자들인 자이니치, 피차별 부락민,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여성들이 가족사진을 통해 풀어낸 자신과 가족의 사연을 묶은 책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마리가 왜 꼭 ‘가족사진’이어야 했을까.
황보씨는 1972년 난생 처음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의성을 방문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우리말을 할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다른 가족들사이에 끼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지요. 그랬더니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앨범을 하나 보여주시는 거예요.”
재일동포들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질 때까지, 혹은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 ‘조선적’을 유지한 탓에 자유롭게 남한의 고향에 오갈 수 없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본국 가족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그런 좋은 모습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자꾸 사진을 보냈더라구요. 고향의 가족들이 그 사진을 잘 묶어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조국에 있던 가족들과 하나로 묶여져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죠.”
가족사진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니 그 안에 담긴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엔 명절마다 고운 한복 때로는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보통 여성들은 기록을 안 남기잖아요. 그래서 사진을 들고 어머니와 얘기하면서 내가 몰랐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삶이 어땠는지, 그들의 희망이 뭐였는지를 알게 됐어요.” 황보씨는 김학순 할머니의 방일을 계기로 간사이 지역 동포 여성들이 모여 만든 단체 ‘미리내’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통해 여성들의 사연을 말하고 듣는 모임을 시작했다.
곁에 있던 박리사(44)씨는 색동 저고리를 입고 네살 때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얘길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무렵 박씨 가족은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살고 있었다. 박씨의 어머니는 어느 날 빨간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한복을 딸에게 입히고 사진을 찍었다. 예쁜 옷을 입고 기분이 좋아진 박씨는 자기 모습을 친구 ‘요코짱’에게 보여주고 싶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머니는 엄한 표정을 짓고 박씨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근처 살던 아저씨가 ‘옆집에 조선 사람이 이사왔다’면서 자치회에 ‘내보내자’는 서명운동을 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제가 색동 저고리를 입고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대요. 그런 심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이 책이 나온 뒤에 들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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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리사씨가 4살 때 색동 저고리를 입고 찍었다. 사진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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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는 2001년 11월 일본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인 시미다 요시코의 도움으로 캐나다에서 ‘자이니치 가족 사진전’ 열 수 있었다. 이후, 미리내의 활동에 공감한 피차별 부락민, 오키나와, 아이누 등 일본 내 다른 소수자 여성들이 관심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책엔 필리핀에서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 오키나와에서 살다 2004년 3월 숨진 여성 프란시스카 세나 아라가키 후미에의 사연이 등장한다. 그의 딸 아라가키 아쓰코는 1980년 9월 아버지가 82살로 숨졌을 때 필리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고향말로 뭔가 울며 호소하던 어머니를 추억한다.
일본 사회의 크고 작은 차별로 시름해 온 여성들이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내는 것은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책 속에 적잖은 여성들이 가명으로 등장한다. 황보씨 역시 책에 가족사진을 공개했다는 말을 “아직 아버지께 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2016년에 나온 책의 일본어판의 제목은 <가족사진을 둘러싼 우리들의 역사>였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조금 더 에세이적인 느낌을 줘 <보통이 아닌 날들-가족사진으로 보는 여성의 삶>이라고 정했다. 사진 속에 기록된 여성들의 이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연(허스토리)들을 우린 역사라 부른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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