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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1 14:31 수정 : 2019.09.01 15:06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이민을 준비 중인 제타(왼쪽)와 나탈리 부부가 아들 에반과 함께 홍콩의 독립을 염원하는 시위 문구 ‘광복홍콩, 시대혁명’이 새겨진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21] 홍콩 시위
홍콩 경찰 폭력 진압 속
“변호사 이민 신청자도 많다”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이민을 준비 중인 제타(왼쪽)와 나탈리 부부가 아들 에반과 함께 홍콩의 독립을 염원하는 시위 문구 ‘광복홍콩, 시대혁명’이 새겨진 손팻말을 들고 있다.
“우리는 홍콩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들 에반(2·廖卓泓)과 다음 세대를 위한 결정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빠 제타(34·廖德華)의 시선은 따뜻했지만 이민을 말하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8월25일 홍콩 시내의 집에서 <한겨레21>과 만난 그는 “홍콩에는 아무런 희망도 미련도 없다. 회사 동료 중에도 우리 가족처럼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내 부모와 처가 식구도 우리의 결정을 지지해서 되도록 서둘러 홍콩을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이민지로는 대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퉁뤄완 서점 사장처럼 중국 본토로 잡혀갈까 불안

제타와 아내 나탈리(32·梁栢盈)가 이민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올해 초 홍콩 정부가 통과시키려 했던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때문이다.

송환법 문제는 지난해 대만에 여행 갔다가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되돌아온 천퉁자(20)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영토 밖에서 일어난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홍콩은 대만과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지 않아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캐리 람 장관과 홍콩 행정부는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개정법안을 내놨는데, 대만·마카오·중국 등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곳에서도 살인이나 밀수 등 중죄를 저지른 범죄인은 송환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범죄인을 송환해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중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은 홍콩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 홍콩 정부는 “7년 이상 형량을 받을 수 있는 중죄를 저지른 경우에만 송환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홍콩 시민들은 믿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 정부에 반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중국으로 송환돼 처벌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의 저변에는 2015년 목격했던 ‘퉁뤄완 서점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층 비리를 폭로하고 금서를 팔기로 유명했던 퉁뤄완 서점의 린룽지 사장과 직원, 주주 등 5명이 실종돼 중국 본토에서 강제수사를 받았던 사건이다.

2015년에 실종됐다가 이듬해 3월 홍콩에 돌아온 린 사장은 3개월 뒤인 6월 기자회견을 열어 “중국 선전에 갔다가 중국 당국에 연행됐고, 5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돼 변호사도 만나지 못하고 정신적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린 사장은 올해 들어 송환법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 4월 대만으로 망명했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은 송환법이 통과되면 언젠가 자신도 린 사장처럼 중국에 끌려갈 수 있다고 두려워한다.

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은 3월 말부터 시위에 나섰지만 본격적으로는 홍콩 입법회의 송환법 검토를 앞둔 6월9일 수십만 명의 홍콩 시민이 거리행진에 나서면서 ‘반송중’(중국 송환 반대) 국면에 들어섰다. 다른 홍콩인들처럼 중국 송환을 두려워하는 제타의 가족도 시위에 참가했다.

열두 번째 열린 송환법 반대 집회에 참가한 양시아(오른쪽)와 그의 애인. 이번 시위는 젊은층이 이끌고 있다.

홍콩 시민들, 기본권 제한 시도 때마다 거리로

애초에 시위는 송환법에 반대해 시작했지만 홍콩 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버텼다. 시위는 장기화됐고, 요구 사항은 늘어났다. 홍콩 시민들은 송환법 완전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 독립조사위원회 설치, 체포된 시위 참가자 전원 석방과 불기소,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회 직선제 실시 등 다섯 가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6월16일에는 홍콩 인구 720만 명 중 2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제타가 반송중 집회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아들을 목말 태워 거리로 나선 날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홍콩 시민의 열망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렇게 많은 시민이 모여 같은 목소리를 내는 날은 나 자신과 아들의 생에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해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제타는 5년 전인 2014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시위에도 친구들과 참여했지만 그때는 반송중 집회처럼 절실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산혁명은 중국 당국이 홍콩 행정장관 선거 출마 자격을 후보선출위원회가 지명한 2~3명에게만 주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촉발됐다. 친중 성향 후보만 행정장관 후보로 임명될 것을 우려한 시민사회는 행정장관 직선제 도입 등을 요구하며 시내 점거농성을 79일 동안 이어갔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쏘는 최루액을 시위대가 우산으로 막아냈다고 해서 우산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요구 사항을 관철하지 못하고 시위가 마무리됐다. 중국의 ‘일국양제’(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 방침에도 홍콩 사람들이 불만을 갖고 있고,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세계 시민사회에 보여준 ‘미완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은 1997년 홍콩 반환을 위해 일국양제를 내세웠다. 중국 본토는 사회주의지만 홍콩에는 자본주의 제도를 적용한다는 구상이었다. 영국 식민지배하에서 150년 동안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은 홍콩에 사회주의를 주입하는 것은 혼란을 가져올 것이므로 2047년까지 50년 동안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보장하겠다고 중국은 약속했다. 영국과 세계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이러한 방침에 지지를 보냈다.

8월25일 홍콩 췬완에서 열린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연합뉴스

검은 경찰, 교활한 경찰 ‘집회 구호’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중국이 일국양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2003년엔 홍콩 정부가, 중국 반대 활동과 외국 정치단체의 홍콩 내 정치 행위 등을 모두 금지하는 내용의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했다. 2012년 중국에 대한 애국을 강조하는 과목을 필수 교과로 지정하는 국민교육을 도입하려 했는데, 홍콩 시민들은 이런 배경에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의지가 깔려 있다고 봤다. 홍콩 정부의 기본권 제한 시도가 있을 때마다 시민들은 시위에 나섰다. 투쟁 끝에 국가보안법 제정과 국민교육을 막아낼 수 있었다.

제타는 “송환법에서 보듯 중국은 홍콩을 흡수하기 위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국민교육은 막았지만 정부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홍콩 사람들이 쓰는 광둥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국민교육, 송환법 등 시민의 뜻을 묻지 않고 계속 추진하는 중국 공산당 정부와 홍콩 정부의 정책에 홍콩 시민들은 지쳐가고 있다. 반송중 국면에서는 시민들이 최장 집회 기록이던 우산혁명의 79일을 경신해 8월29일 현재 83일째로 접어들었지만 홍콩 정부는 시민의 요구를 조금도 듣지 않았다. 8월26일 반송중 집회에 참여하는 20~30대 청년 20여 명과 비공개 회담을 한 자리에서 캐리 람 행정장관은 “송환법을 완전히 철회하기는 어렵다”며 기존 뜻을 고수했다.

나탈리는 “이번 반송중 사태를 보면서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당시 연좌시위를 벌였던 학생·노동자·시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처럼 홍콩 정부도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나탈리는 7월21일 반송중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벌어진 ‘백색테러’(지배계급이 혁명 운동가나 반정부 세력에게 하는 테러)를 집에서 뉴스로 보며 온 가족이 함께 울었다고 했다. 백색테러는 이날 밤 10시30분께 반송중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시민들이 지하철 위안랑역에서 대기하던 흰색(친중 시위대가 주로 입는 색깔) 티셔츠 차림의 괴한 100여 명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이날은 43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감정이 격해진 시위대 일부가 중국 중앙정부를 대표하는 ‘중앙인민정부 홍콩 특별행정구 연락판공실’(연락사무소)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쇠막대와 몽둥이로 무장한 흰옷 차림 남성들이 비무장 시위대를 마구 때렸다. 피해자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다. 시뻘건 피로 범벅이 된 시민들 모습이 전세계로 중계되면서 큰 충격을 줬다. 시위대에 최루탄과 고무탄까지 쏘며 강경 진압에 나섰던 홍콩 경찰이 백색테러 가해자들 검거에는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홍콩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증폭됐다. 더 이상 홍콩 시민들은 경찰을 믿지 않는다. 집회 현장에서 경찰을 비판하는 구호 ‘墨警’(묵경·검은 경찰) 또는 미경(교활한 경찰))을 자주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아파트 18평 월세 300만원 ‘탈홍콩’ 부추겨

제타와 나탈리 부부가 아들의 미래와 홍콩의 미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민을 결심한 건 홍콩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도 큰 몫을 차지한다.

홍콩의 건설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부부는 둘이 합쳐 홍콩달러 6만달러(약 930만원)의 적지 않은 월수입을 거두지만 살림살이는 늘 빠듯하다. 도심 빌딩 11층의 18평 남짓한 아파트에 살면서 월세 2만달러(약 300만원)를 낸다.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지난 15년 동안 400%나 뛰어올랐다. 지난해 거래된 홍콩의 부동산 자료를 보면 평균 집 한 채 가격이 14억5천만원에 육박했다. 이 밖에 아들을 보육시설에 맡기는 데 매달 6천달러(약 100만원)를 낸다. 양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생활비까지 내면 매달 저축액은 1만달러(약 15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친중국파는 중국 관광객이 들어와 홍콩 수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과 홍콩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와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위해 홍콩 시민들이 낸 세금이 끊임없이 중국으로 흘러갔으나, 홍콩 시민들은 얼마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당시 홍콩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였지만 현재는 3%를 밑돈다. 2017년엔 사상 처음으로 홍콩과 인접한 중국 선전시의 GDP가 홍콩을 추월했다. 경제적으로 중국과 홍콩의 ‘주종 관계’가 공고해지는 현실에 시민들은 불안해한다.

중국 정부는 하루 150명씩 홍콩 이주를 허락해주는데 연간으로 환산하면 1년에 5만4750명이 중국에서 홍콩으로 옮겨오는 셈이다. 홍콩의 공공임대주택 정책은 중국인들에게 유리하게 운영된다고 제타는 설명했다. 홍콩 임대주택은 월세가 우리 돈으로 150만원 안팎이라 싼 편이다. “홍콩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하는 SOC 공사도 중국 본토 업체들이 대부분 따낸다. 홍콩 공공주택 임대를 신청하면 홍콩 사람은 6~7년이 걸리는 반면, 중국인은 1~2년 짧은 시간 안에 받는다. 우리가 낸 세금이 우리를 위해 쓰이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제타 가족이 홍콩을 떠나 대만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160만달러(약 2억4천만원)이다. 대만에서 소규모 사업체를 세워 비자를 발급받는 데 드는 비용이다. 이들은 아들 에반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민에 드는 비용을 모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낯선 나라에 이주해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두렵지만 그만큼 홍콩에 절망이 깊다. “홍콩은 150년 영국 식민지배를 벗어나 22년 전 중국에 반환됐지만 자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식민지배에선 영국인에 밀려 2등 시민 신세였으나 지금은 중국인에 밀려 2등 시민이다. 어차피 2등 시민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자유라도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제타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송중 집회 이후 이민 신청자 5배 증가”

홍콩의 반송중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들은 제타 가족뿐만이 아니다. ‘탈홍콩’은 이미 홍콩 시민들의 지배적 정서다. 홍콩의 한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30대 여성은 “현재 홍콩은 중국과 하나가 되는 2047년을 두려워한다. 본토에 가끔 출장을 가는데, 그때마다 휴대전화를 바꿔서 가져가는 게 상식일 정도로 중국을 무서워한다. 홍콩 젊은이들은 누구나 탈홍콩을 꿈꾼다”고 했다.

탈홍콩 정서는 1989년 천안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중국의 무력 진압에 공포를 느낀 홍콩 시민 4만2천 명이 한꺼번에 이민을 떠났다. 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두고도 전문직을 비롯한 중산층 계급 유출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2000년대 들어선 홍콩의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 상황 등을 이유로 이민 신청자는 줄었다.

그러나 우산혁명(2014년)을 전후해 다시 이민 신청자가 늘고 있다. 홍콩의 독립 언론매체 <홍콩프리프레스>(HKFP)가 보도한 내용을 보면 2014년 6900명이 이민 신청을 했고, 2016년엔 7600명으로 늘었다.

탈홍콩 정서는 홍콩 도심에서 진행되는 이민 설명회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8월27일 오후 5시께 <한겨레21>이 찾은 사틴 지역의 한 이민 컨설팅 업체 사무실에는 평일임에도 50여 명이 빼곡히 앉아 강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강의실 벽에는 최근 대만 이민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진과 대만 여권 사진이 빽빽이 붙어 있었다. 강의 내용은 대만에서 작은 가게를 열어 비자를 받고, 대만 국적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강사는 개인사업자로 영주권을 받고 1년이 지나면 대만 국적을 얻어 홍콩과 대만 국적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콩 사틴 지역의 한 이민 컨설팅 업체 사무실에서 이민을 원하는 홍콩 시민들이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 업체의 대표인 셜리 장은 “송환법 반대 집회 이후 이민자가 5배 늘었다”고 했다.

홍콩 지키려 방독면 나눠주는 사람들

이곳 업체 대표인 셜리 장은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다 우산혁명 직후인 2015년께 홍콩에 와 이민 컨설팅 사무실을 열었다. 장 대표는 “우산혁명 직후 홍콩에서 이민 수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민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초기에는 은퇴를 앞둔 50대 중반이 주 고객이었는데, 지금은 20대와 젊은층의 문의가 크게 늘었다. 반송중 집회 이후 지난 두 달 동안은 이민 신청자가 5배 이상 늘었다”고 했다. 의사나 변호사 등 면허를 가진 사람은 훨씬 적은 비용(약 700만원)으로 대만에 갈 수 있다. 장 대표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신청자 중에 변호사가 정말 많다. 이들은 일반인보다 더욱 빠르게 이 상황을 분석한다. 홍콩법이 홍콩 시민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직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홍콩이 중국에 완전히 병합되면 홍콩달러가 종이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미국 달러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장 대표의 말처럼 사회에서 가장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법률가와 의사도 홍콩을 떠나는 현실이다. 떠나는 홍콩인이 늘고 유입되는 중국인이 늘어난다면, 언젠가 홍콩 사람과 홍콩의 정체성은 소멸하는 것일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검은 옷, 검은 마스크의 ‘반송중 시위대’가 있기 때문이다.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주말 집회에 참여하는 앤더 최(28·가명)도 그들 중 한 명이다.

8월21일 수요일 저녁, 회사 일을 마친 앤더는 평소와 달리 집으로 가지 않고, 삼서이보 인근의 한 가게에 들러 방독면과 방독면 필터를 샀다. 상점으로 가는 그는 혹시 누가 따라오지나 않을까 마음 졸이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60928’번이 붙은 필터는 방수가 잘되지만 값이 비싸 조금 망설였다.

앤더는 주말마다 열리는 반송중 집회의 최전선에 서는 학생들을 위해 장비를 산다. 최근 홍콩 언론에서는 학생들이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부모들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용돈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경제적 이유로 집회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돕는 것이 그의 몫이다. 집회 장비를 사느라 그가 쓰는 돈은 매주 수십만원, 한 달이면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가게에 나가 살 때도 있고, 아마존 등 인터넷 쇼핑몰, 일본 사이트에서 사서 배송받기도 한다. 6월 반송중 집회가 본격화하면서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앤더는 보통 일주일에 하루만 참가한다. 그는 평화시위를 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스스로 무력시위에 나서지는 않지만 이미 싸우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장비를 사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집회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던 8월25일 일요일 오전, 눈을 뜬 앤더는 집회 관련 기사를 찾아 읽었다.

8월12일 홍콩 국제공항 점거 시위로 항공 대란이 벌어진 뒤 10여 일 동안 평화집회가 이어졌는데, 전날인 8월24일 오후 쿤퉁 지역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다시 극렬하게 충돌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다시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고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31일 밤 홍콩 도심 코즈웨이베이 지역에서 진압경찰이 불이 붙은 바리케이드를 지나 시위대를 향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기사를 읽은 앤더는 트위터에 접속해 해시태그 #Chinazi (China와 nazi의 합성어) #Xitler(시진핑 중국 주석과 히틀러의 합성어)로 게시물을 검색해 읽었다. 자신도 게시물 몇 개를 올리고 리트윗하면서 ‘#Chinazi #Xitler’를 붙였다. 이렇게 태그를 달아줌으로써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게시물이 더 잘 검색되게 하는 것이다. 시위대는 광장에서 싸우고 난 뒤 온라인에서도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이른바 해시태그 전쟁이다.

중국 정부, “미국이 집회 유도” 가짜뉴스

중국은 홍콩에 정치적 불화를 조장하기 위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가짜 계정을 만들고 “홍콩 집회 시위대는 미국이 유도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뿌린다. 이 사실을 파악한 트위터 본사는 최근 중국이 후원해 조직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계정 1천여 개를 찾아내 삭제했다고 밝혔다. 앤더는 “미국과 여러 나라에서 트위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트위터를 꼭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LIHKG 포럼’에서 나와 그렇게 하고 있다”고 했다. 홍콩의 소셜미디어인 LIHKG 포럼은 반송중 시위 국면에서 젊은 시위 참가자들이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 쓰인다.

앤더는 점심시간 무렵, 이날 거리행진의 출발점인 카이청운동장 옆 쇼핑몰 ‘메트로플라자’에 갔다. 집회 장소로 갈 땐 검은 반바지에 하얀 옷, 파란 신발을 신었다. 가방엔 검은 티셔츠와 마스크가 들어 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홍콩 시내 곳곳에 달린 감시카메라에 찍혀 자신의 신원이 드러날 것을 걱정한다. 홍콩 정부가 곳곳에서 수집한 영상, 사진 자료를 중국과 공유해 언제든 중국 공안에 끌려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앤더는 LIHKG 포럼에서 시위 참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옷을 바꿔 입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경찰이 신발로 시위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은 뒤부터 다른 색깔 신발을 가방에 넣고 집회에 간다.

메트로플라자에서는 집회에 함께 가는 직장 동료 5명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이날 처음 홍콩 경찰이 쓸 수도 있다고 밝힌 ‘살수차’가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살수차가 물대포를 쏠 경우, 살수차에 바짝 다가서면 사정거리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집회 동선을 점검했다. 집회 시간이 다가오자 앤더는 검은 신발과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마스크를 썼다.

그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집회가 모두 끝나는 밤 11시까지 시위대를 따라가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시위대는 경찰을 규탄하기 위해 막바지에는 삼서이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은 전날에 이어 이날 집회에서도 고무탄과 최루탄을 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앤더는 <한겨레21>과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는 시위대의 다섯 가지 요구 사항 중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회 직선제 실시’가 가장 중요하고 꼭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송환법 철회도 중요하지만 중국 공산당 정부가 홍콩의 행정장관을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현 정치체제가 바뀌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국이 지배할 때도 홍콩 시민의 정치 참여는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중국 정부는 2017년 직선제 시행을 약속해놓고 지금까지 지키지 않는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을 뽑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홍콩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만 한다.” 앤더는 캐리 람 행정장관이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일 뿐이기 때문에 람 행정장관 퇴진 요구는 시위대의 5대 요구 사항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람 행정장관이 물러나더라도 또 다른 ‘람 장관’이 중국 입장을 대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당국의 불허 방침에서 수많은 홍콩 시민들이 31일 오후 센트럴 지역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행진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집회 참가자 중 청년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 관련해 앤더는 “부모 세대와 우리는 입장이 다르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40년 전에 중국에서 홍콩으로 경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중국인이라는 인식이 있다. 중국 정부가 부당한 결정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집회에 참여한다고 하면 돈과 안전이 중요하지, 자유와 선거가 왜 중요하냐고 한다. 하지만 나는 홍콩에서 태어났고, 홍콩 사람이다. 홍콩의 미래는 홍콩 사람들이 결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반드시 보통·직접선거를 해야 한다.”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는 중국인이란 정체성이 약하다. 홍콩대학 연구진이 2017년 조사한 내용을 보면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답한 사람이 63.3%로 중국인이라고 답한 사람(34.9%)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18~29살 젊은층에서는 93.7%가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답했다.

맨몸으로 최루탄·고무탄 막아내는 학생들

기자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더욱더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홍콩이 중국에서 독립해야 하는지 판단은 아직 못했다. 하지만 홍콩의 독립 여부도 홍콩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 반환 후 22돌을 맞는 홍콩의 자결권은 홍콩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이었다.

젊은 시위대가 간절하게 외치지만 상황은 긍정적이지 않다. 인구로만 봐도 중국 14억 명에 비하면 홍콩 700만 명은 초라한 인구다. 중국 정부가 준군사조직인 인민무장경찰이 홍콩 인근 선전에 주둔시킨 사진만 봐도 홍콩 사람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당장 시위대는 완전무장한 홍콩 경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앤더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 희망은 집회 최전선에서 경찰이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최루탄과 고무탄, 물대포를 맨몸으로 막아내는 젊은 학생들이다. “반송중 집회 초기에 시위 현장에서 고무탄을 작은 나무 방패로 막는 시위대에게 외신기자가 ‘왜 도망가지 않고 계속 서 있느냐’고 물었는데 학생이 짧게 ‘광복 홍콩, 시대 혁명’이라고 대답한 뉴스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났다. 실제로 학생들의 시위 때문에 송환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나도 한때 탈홍콩을 꿈꿨지만 지금은 아니다.” 앤더는 자신이 취업준비생이던 시절에 우산혁명이 일어나 당시 집회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때 더욱 강하게 저항했더라면 오늘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어린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31일 오후 홍콩 정부청사 부근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파란색 염색제를 섞은 물대포를 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평화시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더라”

중국 정부는 반송중 시위와 학생운동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고 강하게 의심한다. 정부가 공식 발표로도 밝혔지만, 실제 집회를 주도하는 것은 앤더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과 학생들이다. 집회 최전선에서 경찰의 진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어린 학생들의 각오는 필사적이다. 집회 최전선에서 무력시위를 계속한 대학 2학년생 에밀리(20·가명)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청소년 시절에는 우산혁명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우산혁명 당시에는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화시위에만 동참했다. 하지만 우산혁명의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은 평화시위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홍콩 정부는 9월2일 홍콩 시내 대학과 중·고등학교가 개학하면 집회·시위가 잦아들 것으로 내다봤지만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요구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에밀리는 “집회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시위대는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다. 시위대 맨 앞에 서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위험하기 때문에 시위대 중 일부는 ‘유서’를 쓰고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을 계속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에밀리는 짧게 답했다.

“나는 홍콩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집 홍콩과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다음 세대를 위한 싸움이다.”

홍콩=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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