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중국 우한의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주장을 두고 ‘정보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과 확산의 책임을 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정치적 공방이 가열되면서 가짜뉴스성 역정보까지 가세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어권 서방국가 정보기관들의 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의 소식통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의 연구소에서 유출됐다는 트럼프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고 <가디언> 등이 4일 보도했다. 전날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파이브 아이스의 정보 문건을 입수했다며 코로나19의 ‘중국 우한 연구소 기원설’ 등을 전한 바 있는데, 이 ‘15쪽짜리 문건’이 파이브 아이스 정보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파이브 아이스가 만든 것이라고 전한 문건은, 코로나19 발생 및 확산과 관련된 타임라인을 폭로하며 중국이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파기했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기원이 어디라고 직접 단정하진 않았지만, 중국 화난이공대 보고서를 인용하며 코로나19가 우한 연구소에서 흘러나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화난이공대 보고서는 지난 2월에 발표된 것으로,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코로나19가 기원했다고 주장해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한 저자도 나중에 <월스트리트 저널>과 한 회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쪽에선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보도한 문건이 파이브 아이스 네트워크에서 생산된 첩보가 아닐뿐더러 인터넷 등에 공개된 자료를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 언론사들이 내보내는 기사들의 출처는 대부분 미국이라며 “중국에 대한 역정보를 구축하고 압력을 넣는 도구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중국 책임론을 부각하기 위해, 역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코로나19의 우한 연구소 기원설에 힘을 싣는 발언을 꺼내놓으며, 중국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우한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기원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3일 “그곳이 바이러스가 시작된 곳이라는 엄청난 증거가 있다”고 밝혀 논란에 부채질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워싱턴 링컨기념관에서 열린 가상 타운홀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가 중국 연구소에서 나왔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우한 연구소 기원설’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문제 전문 잡지인 <포린 폴리시>는 4일 중국을 면밀히 관찰하는 미국의 3개 정보기관의 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정보당국 내에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없고, 결론을 낼 만한 정보도 없다”고 전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은 “(이번 사태가) 우한의 한 연구소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고의 결과인지는 조사 중”이라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트럼프 쪽의 핵심 고위 관리들이 정보기관들에 코로나19와 우한 연구소를 연계시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고 보도하며, 이런 압력이 코로나19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고, 중국과의 싸움을 고조시키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중국 쪽은 4일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논평을 통해 “사악한 폼페이오가 독을 뱉어내며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파이브 아이스 사이에서도 회의론이 만만찮다. <포린 폴리시>는 파이브 아이스 소속 국가 중 오스트레일리아·영국·캐나다 쪽도 미국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여전히 이르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영국 총리실의 대변인도 코로나19의 기원 및 전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국제적 동반자와 함께 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만 말했다. 코로나19의 유래와 확산에 관해 의문점이 없지는 않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한 것처럼 우한 연구소 기원설을 뒷받침할 명백한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날 미국이 제기하는 우한 연구소 기원설이 “추측에 기반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마이클 라이언 세계보건기구 긴급준비대응 사무차장은 이날 화상 언론 브리핑에서 “아직 미국 정부로부터 코로나19의 기원에 대한 아무런 증거를 받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 밴커코브 신종질병팀장은 한발 더 나가 “코로나19에 대한 1만5천개의 유전자 배열을 확보하고 있지만,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모두 자연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