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으로 한가지는 분명해졌다. 인류 공동의 문제에 직면해 책임있게 국제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갖춘 국가는 없다. 바야흐로 ‘지 제로’(G-0) 시대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모른다. 일국 차원의 노력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비상한 상황을 맞아 세계 각국이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지만, 백신 개발을 포함한 장기적인 대책은 인류 공동의 몫이어야 한다. 바이러스가 불러온 경제적 파장 극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정반대를 향해 가고 있다. 무역전쟁을 가까스로 봉합했던 미-중 양대 강국이 코로나19 사태로 관계 악화의 소용돌이에 다시 뛰어들었다. 지난 8일(현지시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약 6주에 걸친 노력 끝에 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위해 모든 분쟁을 중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이 미-중 갈등 속에 끝내 무산된 것은 ‘지 제로’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중 관계를 두고 ‘투키디데스의 함정’(신흥 강국이 부상하면서 기존 패권국가와 충돌하는 상황)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다. 코로나19는 기존 미-중 갈등 기류에 가속을 붙였다. 데이비드 램턴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펠로(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겨레>에 “미-중 관계는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이래 가장 비생산적이고 불안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2018년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에서 시작됐듯, 이번에도 공세를 펴는 쪽은 미국이다. 미국은 행정부 고위 인사들이 총출동해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고, 발병 초기 중국 정부가 정보를 숨기며 통제해 사태를 키웠다며 중국 책임론을 주장한다.
대표적 대중 강경파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11일 <시엔비시>(CNBC) 인터뷰에서 “그들은 세계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 중국에 대한 청구서가 나와야 한다. 그것은 그들을 벌주는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공산당이 책임지도록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코로나19와 싸우는 데 10조 달러 가까운 비용을 들였다며 “어떤 형태로든 손해배상이 있어야 한다고 미 국민은 강하게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참에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도 밀어붙이고 있다.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국내로 돌아오는 미국 제조기업들의 이전 비용을 100% 대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를 탈중국 및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미-중 양국의 국내 정치적 상황도 갈등 구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오는 11월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는 ‘중국 때리기’와 ‘경제 재건’을 선거의 핵심축으로 삼고 있다. 빠른 경제 회복이 어려워보이는 만큼, 중국 공격이 사실상 그의 유일한 선거전략이다. 민주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 대한 트럼프 쪽의 공격 포인트 또한 ‘바이든은 중국에 약하게 군다’는 것이다. 트럼프 캠프는 지지자들에게 “바이든은 중국을 사랑한다”는 이메일을 뿌리며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 내부 상황도 엇비슷하다. 지난해 건국 70주년을 맞아 절정까지 치솟았던 ‘자존감’은 코로나19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인구 1100만의 대도시 우한을 두달 넘게 봉쇄하는 극약 처방으로 가까스로 바이러스 확산세를 잡을 수 있었다. 무너진 자존감 회복을 위해 의욕적으로 ‘마스크 외교’에 시동을 걸었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 3기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미국의 도발에 적극 맞서는 건 내부 정치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이미 미-중 관계를 설명할 때 ‘전쟁’이란 말이 꼬리표처럼 붙고 있다. 무역전쟁, 기술전쟁, 금융전쟁, 신냉전에 이어 실제 무력충돌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가 지난달 말 시 주석을 포함한 지도부에 제출한 내부 보고서에서 “코로나19로 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 반중 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했다”며, 미-중 무력충돌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중 무역합의 파기 땐 세계질서 ‘냉전 2.0’ 재편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9일 트위터에 미 <시엔엔>(CNN) 방송이 전한 ‘코로나19 기원설’ 관련 전문가의 발언을 올렸다. “폼페이오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은 정보기관을 압박해 코로나19 관련 중국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처럼 만들려고 한다. 이처럼 정치화한 정보가 이라크 전쟁이란 치명적 실수를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어 그는 “중국은 이라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중국의 트위터 격인 ‘웨이보’ 팔로워가 2200만명을 넘는 후시진 <환구시보> 총편집인은 지난 8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느닷없는 ‘핵무장 강화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의 보유 핵탄두를 1천기 이상으로 늘리고, 둥펑-41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100기 이상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의 ‘핵 격차’를 줄여야,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냉전 시절의 용어를 고스란히 되살려낸 그의 글에 달린 누리꾼의 ‘좋아요’는 무려 30만건을 넘겼다.
미-중 간 전면적인 무력충돌 가능성은 중국 전문가들도 높게 보지 않는다. 쉬관유 중국군축협회 선임 자문위원은 11일 관영 <글로벌 타임스>에 “전쟁은 어느 한쪽이 압도적 우위에 있을 때 발생한다. 중국은 군사 기술적 관점에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댜오다밍 런민대 교수도 “직접적인 무력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모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갈등 심화 속 미-중 간 군비경쟁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양국간 전략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우발적인 국지적 충돌 가능성도 상존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10일 “미군은 올들어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일대에서 모두 39차례나 비행을 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에 이른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 본토에 가까운 홍콩 인근에서도 두차례나 비행을 단행했다.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소속 군함은 이른바 ‘항행의 자유’를 내세워 올 들어 지난 4월말까지 모두 4차례나 남중국해에 출몰했다.
중국도 공세적이다. 인민해방군 소속 항공기가 올들어 확인된 것만 모두 6차례나 대만 영공에 근접했다.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호 항모전단은 지난달 두차례에 걸쳐 대만해협 인근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인민해방군 남방전구사령부도 4월 남중국해 일대에서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남중국해에서 전략적 우위를 다투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해가 화를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향후 미-중 관계를 가를 첫번째 고비는 미-중 무역전쟁을 봉합시킨 1단계 무역합의 이행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이행 여부를 보고 판단할 것”이라면서도, 합의 폐기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중국 쪽은 이행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미국 쪽이 코로나19 사태로 중국에 대한 막대한 수출물량을 제대로 공급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단계 무역합의가 파기된다면, 미-중관계는 무역전쟁 이전으로 복귀하는 수준을 넘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미국 내부에선 이미 대중 보복관세 부과와 경제제재, 중국이 보유한 1조1천억달러 규모의 미 재무부 채권 상황 및 이자 지급 중단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무역전쟁이 불을 뿜을 때 중국에선 희토류 대미 수출 중단과 미국 기업의 중국 시장 접근 차단, 미 재무부 채권 회수 등을 ‘대응카드’로 언급한 바 있다. 1단계 무역합의에 포함된 ‘불가항력’ 조항을 발동해 양국이 이행방안 마련을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최악’은 피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미-중, 가장 비생산적·불안한 관계”… 미-소 냉전 버금가는 수준 이를수도
코로나19 사태가 패권경쟁 구도 및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미-중의 갈등은 미국-소련 냉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니 글레이저 아시아담당 선임연구원은 <한겨레>에 “의료용품이나 통신장비 등을 포함해 국가 안보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간주되는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에서 미-중 사이에 선택적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케빈 러드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코로나19 이후 중국이나 미국이 지배하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국내와 국제 모두에서 약해질 것”이라며 “이 몰락에서 새로운 ‘팍스 시니카’(중국 주도 평화체제)도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 평화체제)도 부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런민대 주최로 열린 미-중 관계 관련 온라인 포럼에서 이 학교 스인훙 교수는 “코로나19 사태는 미-중 간 물리적, 심리적 디커플링을 촉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과 단절을 모색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중국이 미국의 공백을 채울 기회가 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이른바 ‘주요국’이 없는 세계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미국은 국제사회 이끌 의지 없고, 중국은 능력이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의지가 없다. 하지만 그 역할을 중국이 대신하는 건 가로막고 나설 터다. 미-중 경제·무역 관계 약화할 것이며, 미국은 대중 기술봉쇄 강화 속에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조정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오는 11일 미 대선 때까지는 양국 간 갈등과 경쟁 구도는 갈수록 심화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러드 전 총리는 미국이 중국에 연금기금 투자를 중단하거나 중국의 미 국채 보유를 제한하고 통화 전쟁을 할 경우 미-중의 재정적 연결고리가 빠르게 제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를 군사화하려 할 경우 ‘대리전’의 위험성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냉전2.0은 아니지만 냉전1.5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베이징 워싱턴/정인환 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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