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코비나에서 11일(현지시각) 열린 인종차별주의 반대 시위에서 한 남성이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어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토렌스에서 백인 여성이 아시안 할머니에게 심한 욕을 하며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미국에 살기 싫어질 정도로 무서운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에드워드 리(66)는 지난 8일(현지시각) 엘에이에서 한 시간 떨어진 리알토에서 한인 노인이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흑인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분노와 두려움으로 마음이 착찹하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에 사망한 이후 미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등을 외치는 항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인들을 비롯한 소수인종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 소식이 잇따르면서 로스앤젤레스 동포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사건 직후, 약자인 흑인이 또다른 약자인 한인 노인을 폭행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한인 사회에 뜨거운 논쟁 사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한인 사회에선 가해자가 ‘흑인 남성’이라는 데 대해 분노를 표시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번 사안을 ‘흑인 대 한인’의 대결 구도로 볼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뜨겁게 엇갈리고 있다.
미주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미시 유에스에이’에는 가해자가 흑인이라는 점에 주목해, 흑인은 물론 흑인운동을 지지하는 한인들까지 비난하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한인상점을 약탈하고 노인을 폭행하는 흑인들이 인권을 내세울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백인들에게 차별당한 흑인들이 아시안에게 분풀이를 한다”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를 넘어 “흑인들은 게으르고 질서를 지키지 않으며 세금만 축내고 범죄를 저지른다”는 혐오 발언까지 나오기도 했다.
특히 한인 노인이 타깃이 된 것과 관련, 코로나19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갈등 상황을 만들며 아시안계에 대한 혐오를 급격히 확산시킨 것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민법 변호사 존 유는 “백인이 다수인 국가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로 중국에 코로나19 사태의 책임을 덮어씌우면서 심화된 반중국 정서가 무차별적으로 반아시아계 정서로 확산됐다”며 “이를 통해 기존에 갖고 있던 선입견이나 혐오가 다시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 사안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차별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폭행으로 얼굴에 피멍이 든 할아버지의 사진을 올렸던 당사자(피해자의 손녀)가 지난 9일 “내가 어제 올린 글은 인종차별이 곳곳에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 글을 올려 “많은 사람이 이번 일을 아시아계와 흑인의 대결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며 “이번 일로 한인과 흑인 간의 대결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손녀와 의견을 같이 하는 이들은 인종차별적 혐오범죄와 싸우기 위해 약자 간 연대와 화해 필요성을 강조했다. 엘에이 시민 임재환씨는 “약자를 향한 차별과 폭행은 인종에 상관없이 일어난다”며 “약자들끼리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엘에이 지역에서 한인과 아시안 중심으로 평화운동을 펴고 있는 ‘아시안 화해센터’의 허현 목사는 이와 관련 “혐오범죄를 막고 인종 간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바르게 기억하기’와 함께 ‘진정한 사과’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근현대사 속에서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기에 혐오범죄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주 한인 유권자연대’(KAGC)는 리알토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노마 토레스 연방 하원의원실에 조속한 시일 내에 가해자에게 처벌을 가하고, 모든 시민이 인종과 출신에 상관없이 인종주의, 적의, 차별에 기인한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한인 노인 폭행 사건과 관련, 리알토 경찰은 지난 10일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리알토 경찰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노인 학대라는 중범죄로 이 사건을 수사 중”이라며 “가해자는 검은색 후드티 또는 재킷, 흰색 바지를 입은 흑인 남성”이었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 사건이 인종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는 정보가 인터넷에 돌고 있지만, 용의자의 동기를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로스앤젤레스/이철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