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핀테크 업계의 선두주자를 질주하다 최근 회계 부정으로 위기에 몰린 와이어카드의 서비스를 홍보하는 안내판. 베를린/EPA 연합뉴스
미국 실리콘밸리식 디지털 기술을 도입해 독일 금융계를 선도하던 핀테크 기업이 수조원대 회계 부정에 휘말리면서 독일 금융계의 검증과 규제 능력까지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기업은 1999년 설립된 전자 결제와 가상 신용카드 업체 와이어카드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21일(현지시각) 와이어카드 경영진이 감사 결과에서 ‘어디 있는지 파악되지 않은’ 현금 19억유로(약 2조5600억원)는 필리핀의 은행 두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벤저민 디오크노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가 성명을 내어 “이 돈이 필리핀에 들어온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고 전했다.
돈을 보관한 은행으로 거론된 비디오유니뱅크(BDO)와 필리핀군도은행(BPI)도 와이어카드의 계좌가 자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두 은행은 이 회사의 외부 감사기관인 회계법인 언스트영(EY)이 받았다는 계좌 잔고 서류는 조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17일 와이어카드는 19억유로의 돈이 사라졌으며 필리핀 은행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돈을 언스트영이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발표했다. 마르쿠스 브라운 최고경영자는 독일 신문 <쥐드도이체 차이퉁>이 문제의 필리핀 은행들 이름을 공개한 직후인 18일 사임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와이어카드는 22일 성명을 내어 19억유로는 애초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뒤 2019년 영업보고서 내용을 철회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로써 2019년 초부터 논란을 거듭한 이 회사의 회계부정 의혹은 사실로 굳어질 상황이다.
와이어카드는 2004년 말 독일 정보기술 업체 인포지니에 인수된 뒤 첨단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금융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2007년에 싱가포르 지사를 설립해 아시아 금융 시장에 뛰어들었고 2017년에는 미국 시티은행의 선불카드 사업을 인수해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런 성장세에 힘입어 2018년에는 시가총액에서 독일 금융계의 상징과 같은 도이체방크를 앞지르는 등 거침없는 성장세를 이어갔다.
지난해 1월 ‘독일 디지털 금융계의 희망’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와이어카드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책임자가 금융 계좌 조작과 돈세탁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와이어카드는 즉각 허위 보도라고 반발했고 독일 검찰이 기사를 쓴 기자를 수사하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독일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의 마르쿠스 브라운 최고경영자가 2019년 4월25일 2018년 경영 실적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회계 부정 논란 속에 지난 18일 물러났다. 아슈하임/로이터 연합뉴스
사태가 ‘논란’에서 ‘의혹’으로 바뀐 계기는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난해 10월 이 회사의 회계 부정 의혹을 뒷받침할 내부 자료를 공개하면서부터다. 신문은 “내부 스프레트시트 자료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두바이와 아일랜드 지역 사무소가 공동으로 매출과 이익을 뻥튀기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보도했다.
의혹은 공정한 조사를 위해 따로 선임한 회계법인 케이피엠지(KPMG)의 특별감사에서 회계상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와이어카드가 3월13일 발표하면서 해소되는 듯 했다. 하지만 케이피엠지가 4월28일 10억유로의 현금 잔고를 증명할 서류를 해당 은행으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케이피엠지는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 계좌 위탁 관리자가 지난해말 갑자기 와이어카드와 관계를 끊었으며 이 돈은 아시아에 있는 다른 은행으로 송금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확인 액수는 지난 17일 와이어카드의 기존 감사기관인 언스트영에 의해 다시 19억유로로 불어났다. 이 액수는 회사의 2018년 매출액 20억유로에 버금가는 데다가, 순이익(3억5천만유로)의 5배를 넘는 거액이다.
와이어카드는 2019년 영업보고서 발표 최종 시한인 18일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채권은행단이 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도 있는 상황에 빠졌다. 이 회사는 채권은행단과 20억유로 규모의 대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데,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19일 회사의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떨어뜨리는 등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와이어카드 회계 부정 사건은 독일 금융 규제 문제와 증권업계의 기업 분석 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독일의 명성에 손상을 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파비오 데마시 독일 연방하원 의원은 연방금융감독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독일 언론인 베른트 치제머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전문 투자자들은 꾸준히 제기된 의혹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와이어카드의 주가 흐름에 올라타는 데 바빴고, 소액 투자자들은 이 회사를 옹호하는 데 바빴다”며 “이번 사건은 프랑크푸르트 증권가가 왜 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느냐는 물음을 제기한다”고 썼다. 그 또한 가장 큰 책임은 연방금융감독청에 있다고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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