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펀자브주 라호르에서 여성들이 ‘환영 2021년’이라고 적힌 종이와 촛불을 들고 새해 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 펀자브주 법원은 4일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처녀성’을 검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라호르/AP 연합뉴스
성폭력 피해 여성의 ‘처녀성’을 확인하는 파키스탄의 수사 절차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최고 법원인 고등법원은 4일(현지시각) 강간 피해 여성의 성 경험 유무 검사가 인권을 침해한다며 여성 운동가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이 절차를 위헌으로 판단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5일 보도했다. 이 결정은 파키스탄의 4개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펀자브주에만 적용되는 것이지만, 신드주 등에서 진행중인 유사한 소송에 선례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방송은 전했다.
사건 심리를 맡은 아예샤 말리크 판사는 “처녀성 검사는 심한 인권 침해이며 과학적·의학적 필요성이 없음에도 성폭력 사건에서 의학적 절차라는 명목으로 시행되고 있다”며 “이는 성폭력 가해 혐의자에 집중하는 대신 피해자를 검증하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법원은 처녀성 검사를 규정한 2015년과 2020년의 지침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펀자브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국제 기준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할 수사 절차를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결정에 대해 여성 운동가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시했고, 파와드 초드리 연방 과학기술부 장관도 “획기적인 결정”으로 평가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성폭력 피해 신고 여성의 과거 성경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처녀막을 확인하거나 성기에 손가락을 넣어 질의 크기를 점검한다고 현지 위성 뉴스 채널 <사마 티비>가 전했다. 처녀성 검사는 서남아시아에서 식민지 시절부터 시행됐으며,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따르면 현재도 최소 20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인도의 경우 2013년 이를 금지했고, 2018년에는 방글라데시와 아프가니스탄도 금지 조처를 취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여성들이 성폭력 사실이 알려질 경우 사회적 낙인을 우려해 신고를 잘 하지 않는 데다가, 복잡한 수사 절차와 약한 처벌 규정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일도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펀자브주 라호르에서 교통 사고를 당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면서, 성폭력 처벌 강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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