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시내 한 대형 사무실 건물에서 경비업체 스마트섹 소속 보안요원들은 매일 오전 11시15분께 오전 보안 점검을 한다. 평소 같으면 입주 기업 직원들과 방문객으로 분주한 가운데 근무하겠지만, 요즘은 적막감 속에 외롭게 일한다. 평소 3000명이 일하던 건물에 근무자는 30명 정도뿐이라고 스마트섹 관리자 시오 니콜라우는 말한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 낯익은 근무자가 들어올까 싶어 돌아보는 보안요원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독감뿐 아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방문객을 맞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도 시달린다. 사무실이 영영 원래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일자리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크다고 니콜라우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밝혔다. 텅 빈 건물을 몇몇 사람이 지키기는 미국 뉴욕 등 많은 대도시도 마찬가지이며, 공항 등 다른 시설 보안요원의 처지도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니콜라우는
지적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해를 넘긴 지금, 보안요원 같은 현장 근무자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안전한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자를 포함해 거의 모든 노동자가 비슷하게 겪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최근 전세계 28개국 16~74살 노동자 1만28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고 답했다.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아르헨티나, 터키는 불안감이 커졌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전체의 70%를 넘었다. 반면, 일본과 네덜란드는 그 비율이 30% 이하로 가장 낮았다.
코로나19 차단을 위한 봉쇄 조처로 한산한 영국 런던 시내 한복판에 ‘사회적 거리두기’ 알림판이 서 있다. 코로나19는 재택근무자와 현장 근무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에게 불안과 고립감,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업무나 조직의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해졌다고 답한 이들도 응답자의 55%에 달했다. 또 전체의 절반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기 힘들어졌다고 했고, 가족을 돌보는 데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한 이도 전체의 45%나 됐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어려움은 35살 이하 젊은층에서 유독 심했고, 저소득층과 여성도 고소득층이나 남성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코로나19 사태가 촉발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재택근무 확산이었다. 전체 응답자의 51%가 재택근무를 경험했다고 밝혔는데, 전체의 20%는 강제적으로, 31%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집에서 일했다고 답했다. 재택근무자의 49%는 일할 때 외로움이나 고립감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재택근무에 이은 주요 변화로는 노동시간 변동이 꼽혔다. 눈길을 끄는 점은, 노동시간이 줄어든 적 있다는 이와 늘어난 적 있다는 이가 똑같이 32%였다는 사실이다. 노동시간이 과거보다 들쭉날쭉하다는 이야기다. 노동시간이 줄었다는 이들이 많은 나라로는 인도, 사우디,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말레이시아가 꼽혔다. 인도, 사우디, 남아공은 노동시간이 늘었다는 응답자가 가장 많은 5개국 안에도 들어, 노동시간의 변동 또는 양극화가 특히 심했다. 한국의 경우 노동 감소(37%)와 노동 증가(34%)가 비슷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실직(7%)이나 퇴직(8%) 등으로 한동안 노동을 중단했던 이는 15%로 집계됐다. 또 응답자의 46%는 바이러스 대유행 이후 업무 생산성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가 코로나19 충격에 시달리면서 노동과 삶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며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함께 일상생활에까지 큰 충격이 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충격은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통제한 나라에서도 비슷했다.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뉴질랜드의 노동조합연합회는 이달 초 1200여명 대상 온라인 조사 결과, 코로나19가 일과 수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답한 사람이 49%에 달했다고 18일 밝혔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 대책으로 도입된 재택근무와 유연 노동이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도 유지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벤저민 디오크노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로이터> 통신이 주최한 포럼에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오류일 것”이라며 “우리는 이미 대면 접촉 없는 디지털 산업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지난해 11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미국, 영국, 중국, 인도 등 9개국 800개 직업군의 2000여개 업무를 분석한 결과, 전체 인력의 20% 이상이 앞으로도 주 3~5일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3~4배에 해당한다.
재택근무 비중이 가장 높을 것으로 평가된 나라는 영국이었다. 전체의 33%가 재택근무를 해도 별문제가 없으며, 업무 효율의 하락을 감수할 경우 44%까지 비중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독일의 경우는 30%가, 미국과 일본은 29%가 재택근무를 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분석됐다. 멕시코, 중국, 인도의 경우 이보다 많이 낮은 12~18% 수준으로 평가됐다.
다만, 재택근무는 지식 처리나 컴퓨터 관련 업무, 창조적 작업 등 고학력 전문직에 집중되고 전체 노동자의 절반은 재택근무의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재택근무가 어려운 직군은 임금이 낮고 자동화로 사라질 위험도 큰 업무여서, 노동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고서는 우려했다.
세계 경제가 코로나19 충격에서 벗어나더라도, 저임금 노동자, 젊은 비숙련 노동자, 여성, 고령자 등 취약계층의 상황은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비관적인 전망이다. 재택근무의 확대는 또 직장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도심의 상점이나 운송 관련 업종 등 ‘도심 경제’ 전반에도 상당한 충격을 끼칠 것으로 보고서는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지만, 노동의 미래 논의는 사무·전문직에만 집중되고 있다. 제조업을 비롯한 현장 노동자들과 취약계층의 노동 현실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영국 옥스퍼드대학 베일리얼칼리지 경제학과의 대니얼 서스킨드 연구원은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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