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던 아일랜드의 라이언에어 항공기가 벨라루스 정부의 지시에 따라 23일 민스크 공항에 긴급 착륙했다. 민스크/EPA 연합뉴스
옛 소련에 속했던 벨라루스가 23일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운항하던 외국 항공기를 자국에 강제 착륙시킨 뒤 자국 야권 인사를 체포해, 유럽연합(EU)과 미국 등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이 사건은 자국 영공을 통과하는 외국 민간 항공기의 자유로운 운항을 방해하는 조처로 받아들여져, 국제 항공 업계의 반발을 살 여지도 크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언론 담당실은 이날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향하던 아일랜드 국적 라이언에어 여객기에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신고를 받고 전투기를 출격시켜 긴급 착륙시켰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라이언에어 쪽은 벨라루스 관제당국의 강제 착륙 지시에 따라 착륙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 여객기에는 승객 약 170명이 타고 있었으며, 벨라루스 야권 성향 인사 라만 프라타세비치(26) 등 일부 인사를 뺀 나머지 승객은 이날 밤늦게 다시 항공기를 타고 벨라루스를 떠났다.
이날 벨라루스 당국에 체포된 프라타세비치는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에 개설된 ‘네흐타’ 채널의 공동 설립자다. 이 채널이 지난해 루카셴코 대통령 반대 진영의 시위 조직에 도움을 주자, 벨라루스 당국은 그를 ‘극단주의자’로 규정했다. 그는 현재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고 <에이피>는 전했다.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던 항공기에 탔다가 23일 벨라루스 정부의 항공기 강제 착륙 지시 이후 당국에 체포된 야권 언론인 라만 프라타세비치(가운데)가 2017년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민스크/AP 연합뉴스
벨라루스에선 지난해 8월9일 대선에서 당시 26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루카셴코 대통령이 80% 이상의 득표율로 압승한 것으로 나타나자, 선거 부정을 주장하는 항의 시위가 몇달째 계속됐다. 현재는 항의 시위가 잦아든 상태지만, 당국의 야권 인사 체포가 이어지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유럽연합은 즉각 벨라루스의 외국 항공기 강제 착륙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날 트위터에 이번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모든 승객은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유럽연합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주제프 보렐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도 트위터에 “우리는 벨라루스 정부에 모든 승객과 해당 여객기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고 경고했다.
프라타세비치가 현재 거주하는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이번 사건을 ‘국가 테러리즘 행위’로 규정하고, 24일 열릴 유럽연합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벨라루스 제재를 논의하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도 “이런 행동이 유럽연합의 확고한 대응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며 프라타세비치를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도 “강제 착륙으로 추정되는 이번 일을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는 토니 블링컨 장관 명의의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국제민간항공기구 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제 항공 업계 차원의 벨라루스 제재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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