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젠틸로니 유럽연합 경제담당 집행위원(오른쪽)과 스벤 기골트 유럽의회 의원이 1일(현지시각) 조세 연구소인 ‘유럽 조세 관측소’ 개설 기념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유럽연합과 유럽의회는 이날 기업 조세회피 방지 대책에 합의했다. 브뤼셀/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전세계 대기업의 조세회피에 대응하기 위해 개별 회원국 및 22곳의 조세회피처에서 발생한 이익과 납세액, 직원 수를 공개하도록 하는 안을 마련했다. 이는 미국 등 주요국의 글로벌 최저법인세(법인세 하한선 설정) 움직임과 함께 기업의 세금회피 규제를 촉진할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연합 회원국과 유럽의회 대표들이 1일 대기업의 이익·납세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걸 뼈대로 한 규정안에 합의했다고 <로이터> 통신 등이 보도했다. 합의안은 전세계 매출이 2년 연속 7억5000만유로(약 1조원)를 넘는 기업에 대해 27개 회원국별로 이익과 납세액, 직원 수를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또 유럽연합이 조세 관련 비협조 국가로 지정한 22개 나라·지역의 영업활동에 따른 관련 자료도 합계 기준으로 공개해야 한다.
회원국별 납세 정보 공개는 유럽연합 내에서 세금이 낮은 회원국으로 기업들이 몰리는 현상 등에 대한 대응책의 성격을 띤다. 유럽연합 내에서 생기는 조세회피 규모는 한해 500억~700억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기업의 국가별 납세 액수가 공개되면 회원국 간 조세 정책 조정을 통한 과세 강화 압박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합의에 조세회피처가 포함됨에 따라 역외 탈세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도 강화될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유럽연합은 미국령 사모아와 괌, 버진아일랜드, 영국령 앵귈라, 피지, 파나마 등 12곳을 조세 관련 비협조 국가(블랙리스트)로 지정하고 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터키 등 10곳은 부분적 비협조 국가(그레이 리스트)로 지정한 상태다.
한국의 상장기업 204곳이 지난해 매출 1조원을 넘긴 걸 고려할 때, 유럽연합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전세계 대기업은 거의 빠짐없이 납세 정보 공개 대상이 될 전망이다.
기업 조세 정보 공개안은 2016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처음 제안했으나, 그동안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등이 글로벌 최저법인세 설정을 세계에 촉구하고, 코로나19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수 증대 필요성도 대두되면서 논의가 빨라졌다.
유럽의회의 협상 대표 에벨린 레그너 의원은 “이번 합의는 유럽 내 조세정의와 회계 투명성을 향한 첫걸음을 뗀 것으로 확신한다”고 평했다. 많은 정치인들과 조세정의 관련 활동가들도 이번 합의를 환영했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전했다.
하지만 허점이 크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제 비정부기구인 ‘조세정의 네트워크’의 ‘기업 세금회피 인덱스 2021’ 기준으로 조세회피 책임이 가장 큰 10개 나라 가운데 영국령인 버진아일랜드·케이맨제도·버뮤다와 영국 왕실령 저지섬, 스위스, 홍콩,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는 이번 정보 공개 대상국에서 빠져 있다.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은 “세계 약 200개 나라 가운데 75%에서는 여전히 기업들이 비밀을 지킬 수 있게 된다”며 “유럽연합 규제당국은 기업들이 이익을 버뮤다, 스위스 등으로 옮김으로써 계속 세금을 회피할 기회를 준 셈”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합의안이 확정되려면 유럽의회 2개 상임위와 총회, 전체 회원국의 합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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