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뒤 미군정 아래 일본에서는 전범은 물론 전쟁에 적극적인 군국주의자들이 공직에서 대거 추방됐다. 이에 따라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등 미군정의 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평화헌법을 지켜나가는 보수 본류 노선이 정립됐다.
보수파 안에서 강온 갈등이 본격화한 것은 추방됐던 우파 거물들이 정계로 복귀하면서부터이다. 강경 우파는 평화헌법 폐기와 일본 재무장을 주창하며 보수 본류와 팽팽히 맞섰다. 특히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정권을 잡는 등 강경파가 한때 전면에 부상하면서, 개헌 논의가 무성해졌다. 이들 강경파는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의 후폭풍으로 기시 내각이 붕괴하면서 비주류로 밀려났다. 이후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보수 본류 노선이 안착했다.
80년대 중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의 발족과 90년대 초 냉전 종식을 계기로 일본의 군사력 확대를 요구하는 신우익이 출현했다. 이들은 걸프전을 발판 삼아 개헌을 통한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주장했다. 일본 거품경제 붕괴와 무기력한 자민당 온건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도 이를 부채질했다. 신우익은 90년대 후반 북한 미사일 발사 파동으로 안보 불안이 고조된 틈을 타 자민당 안에서 주류를 형성했다. 2001년 고이즈미 정권 수립으로 극우가 마침내 전면에 나서게 됐다. 야당에선 진보적인 사회당이 90년대 중반 자멸의 길을 걸은 반면, 마쓰시타정경숙 출신 소장 우파들이 대거 활약하는 민주당은 제1야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사인식의 반동적 흐름도 93년께부터 본격 재개됐다.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 등의 침략전쟁 사죄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인정에 대한 반발이 자민당 극우파를 중심으로 터져나왔다. 침략전쟁과 가해 사실을 교과서에서 없애려는 운동이 제기돼 97년 학자 중심의 민간조직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출범했다. 한달 뒤 자민당에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과서를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닻을 올렸다. 이들이 두 축이 돼 왜곡 교과서를 직접 펴내는 등 ‘역사 되돌리기’ 공세를 주도하고 있다.
고이즈미는 총리로 올라선 뒤 지난 85년 나카소네 총리가 8·15 참배를 감행했다 호된 비난으로 중단했던 야스쿠니 참배 문제를 폭발적으로 재점화했다. 그가 총재 경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야스쿠니 참배를 고집스레 단행하면서 주변국 마찰의 핵으로 떠올랐다. 81년 결성된 ‘모두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등 야스쿠니파 정치인들의 준동도 노골화됐다.
도쿄/박중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