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일본

44살 ‘청년극장’의 늘 푸른 진보 정신

등록 2008-01-06 20:10

도쿄/김도형 특파원
도쿄/김도형 특파원
특파원리포트
1964년 창단 ‘명문극단’ 명맥
군국주의·전쟁책임 정면 다뤄
역사 외면 않는 ‘양심’ 인상적

지난해 12월27일 우연찮게 도쿄 신주쿠에 있는 ‘청년극장’이라는 극단의 송년모임에 참석했다. 송년모임이라면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게 한국이나 일본이나 통상적인 모습이지만, 청년극장은 조금 색달랐다. 그것은 또하나의 무대이고 또한편의 연극이었다. 2007년 청년극장이 무대에 올린 작품마다 출연자들이 팀을 짜 장기자랑을 하며, 한해의 성과를 자축하고 객석을 찾아준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가 2시간 가량 펼쳐졌다.

이날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사람은 극단 배우들이 아니라, 떨리는 손으로 서툰 마술솜씨를 선보인 80대 후원자였다. 1964년 창단한 청년극장이 명문극단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청년극장 친구 모임’의 연간 회원 3천여명과 ‘청년극장 전국 후원회’ 회원 300여명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날 송년모임에 초청된 각계각층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고 진지하고 진보적인 창작작품을 매년 4~5편씩 무대에 올리는 청년극장의 원동력 같은 것을 새삼 실감했다. 과거에 비해 관객이 크게 줄어 청년극단 단원들은 최저생계 수준을 감내하면서도 관람료가 아깝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해 4월과 11월 두차례 걸쳐 청년극장의 작품을 실제 감상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번째 본 <수학여행>이라는 코미디 형식의 작품에선, 오키나와에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의 하룻밤 즐거운 소동과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가 절묘하게 교차됐다. <족보>를 보면서는 우리도 일본에 대해 저렇게 진지한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반문을 해봤다. 해방 때까지 서울(경성)에서 자란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1930~75)의 동명소설을 작품화한 <족보>는 친일파 지주인 설진수가 왜 창씨개명만은 그렇게 반대했는지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잔혹성을 잘 드러냈다. 70대인 아오키 리키야(1968년 입단)는 ‘친일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설진수의 이중적인 면모를 중후하게 표현했다. 송년모임에서 만나 인사를 하자 아오키는 “진도아리랑을 좋아한다”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설진수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다 그의 고민을 이해하게 되는 조선총독부 관리 역을 맡은 후나쓰 모토이는 송년무대에서 우리말로 <고향의 봄>을 능숙하게 부르기도 했다.

청년극장과 한국의 교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청년극장은 2005년 <총구-교사, 기타모리 류타의 청춘>이라는 작품을 들고 한국 14개 도시 순회공연을 펼쳐 신선한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이 작품은 99년 세상을 뜬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전쟁 당시 초등학교 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교육의 광기와 전쟁 책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은 일본 양심세력의 존재를 각인해주는 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청년극장은 수도권 일대에서 맛뵈기로 선보였던 <족보>의 전국 공연을 올해 계획하고 있다. 4월에는 한국의 극작가 박상렬씨 작품인 <오장군의 발톱>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2014년 창단 50주년을 맞는 청년극단이 내건 ‘50년을 향한 도전 활동의 근간’ 네가지 가운데는 아시아·세계와의 연극 교류 확대도 포함돼 있다.


청년극장의 작품을 보면 자신의 치부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외부를 향해 늘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속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늘 푸른, 진보의 정신을 본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1.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2.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3.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4.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5.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