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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4 20:52 수정 : 2005.01.24 20:52

2000년 5월 일본 총리실 기자실에서 이상한 문서가 발견됐다. 문서에는 “질문을 얼버무려 넘길 것” “회견을 길게 하지말 것” 등의 행동요령이 적혀 있었다.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망언을 했다가 궁지에 몰린 모리 요시로 당시 총리의 해명성 기자회견을 위한 조언을 담은 것이었다. 작성자는 〈엔에이치케이〉 총리실 담당 기자인 것으로 일본 언론계에서 공인돼 있다.

1981년 2월 엔에이치케이 간판 뉴스 프로그램에 방영될 예정이던 ‘록히드 사건-다나카 가쿠에이의 빛과 그림자’라는 특집의 일부가 갑자기 당시 보도국장의 업무명령으로 ‘잘려’ 버렸다. 그 국장은 정치·사회부를 중심으로 제기된 거센 항의를 어물쩍 넘긴 뒤 명령철회에 앞장섰던 부장과 데스크를 쫓아냈다. ‘엔에이치케이 뉴스가 죽은 날’이라며 대소동이 일어났지만 그 국장은 이후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일본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와 정치권의 유착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들이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특집 프로그램의 외압 시비와 관련한 엔에이치케이의 ‘결백’ 주장을 신뢰하기 어려운 데는 뚜렷한 외압 정황과 함께 이런 굴절된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엔에이치케이는 정부·국회의 인·허가와 예산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선 다른 나라 공영방송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엔에이치케이의 ‘권력 눈치보기’가 훨씬 심한 것은 이 방송의 권력구조 자체가 정치파벌과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치부 기자 출신들이 주요 간부직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는 이 방송에선 ‘만년 여당’ 자민당의 정치파벌을 등에 업고 벌이는 자리 싸움이 치열하다. 기자들이 든든한 배경으로 활용하기 위해 담당 파벌과 끈끈한 관계를 쌓아나가는 데 비례해 정치권의 입김도 강화돼왔다. 특히 옛 다케시타파 담당 기자로 이 파벌의 후원 속에 3선까지 성공한 에비사와 가쓰지 현 회장 체제가 들어선 뒤 자민당 파벌 실력자들의 개입이 더욱 직설적이고 노골화한 것으로 지적됐다. 이 방송의 한 기자는 “정치부 기자들이 담당 파벌과 ‘한몸’이 돼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방송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엔에이치케이와 정치〉라는 책을 쓴 가와사키 야스시 스기야마여대 교수는 양쪽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 권력과 대치하던 엔에이치케이는 이후 타협을 거쳐 굴복했으며, 70년대에는 복종으로, 80년대 이후에는 다시 영합으로 옮겨갔다.” 이미 ‘알아서 기는’ 단계까지 와 있다는 것이다.

엔에이치케이 간부들이 외압을 받지 않았다며 내놓은 해명은 이런 분석을 잘 뒷받침한다. 우파 실력자들과 방영되지 않은 프로그램의 내용을 놓고 상의한 것이나, 이들의 한마디에 사실상 편집이 완료된 프로그램을 대폭 뜯어고친 것이 통상적인 일이라는 주장은 외압이 그만큼 ‘일상화’돼 무덤덤해졌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유력 정치인들이 거리낌 없이 외압성 발언을 하는 것은 정권이 교체되지 않아 정치적 긴장이 사라진 탓이며, 이번 소동은 일본에서 말하는 ‘자유’의 취약성을 잘 드러낸 증거물”이라는 한 미디어 학자의 지적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중언/ 도쿄 특파원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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