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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29 20:30 수정 : 2015.04.13 16:11

21일 전석호씨가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서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헌화하고 있다. 전씨의 부친은 73년 전 이곳 해저에 있던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로 숨졌다. 현재 이곳에 해저탄광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저 멀리 우뚝 솟은 ‘피야’뿐이다. 사진 길윤형 특파원

1942년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한국인 136명 사망…바다밑에 묻힌 망국의 한

“아버지, 내년에 또 올게요!”

바다를 향해 큰절을 올린 전석호(83)씨가 허공을 향해 애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난 22일 오전 11시 반, 일본 혼슈의 최서단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도코나미 해안에 선 그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자꾸만 뒤뚱거렸다. 3월의 봄바람에 넘실대던 파도가 금세 노인의 신발을 적셨고, 격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훔쳤다. 노인의 눈길이 향한 저만치 바다엔 이곳에 해저 탄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2기의 ‘피야’(해저탄광에 연결돼 있던 배수·배기 통로)가 덩그러니 솟구쳐 있다. 현장을 찾은 한국, 일본, 재일 조선인 시민들이 바다에 꽃을 던져 73년 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억울한 넋을 달랬다.

현재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한·중과 일본 사이에 엄존하는 역사 인식 문제다. 지난 21일 더 이상의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서울에 모인 3개국 외교장관은 “역사를 직시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정신을 재확인했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명확한 반성의 뜻을 밝히지 않는 한 조기 관계 개선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는 한·일 시민들의 연대는 해방 70년 동안 많은 굴곡을 겪어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석호씨의 부친 전성도(창씨명 마쓰모토 세이도)의 목숨을 앗아간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둘러싼 수십년간의 공방이다.

전석호씨의 부친은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인 1942년 2월3일 이곳 도코나미 해안에 자리해 있던 해저 탄광인 조세이 탄광의 수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날 오전 9~10시께 발생한 수몰 사고로 당시 탄광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136명을 포함해 모두 183명이 숨졌다.

사고 당시 전석호씨는 탄광 근처에 있던 니시키와 국민학교 5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아침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탄광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전씨는 단숨에 마을로 달음박질했다.

조세이 탄광 터에선 여전히 예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부들은 갱도 입구에 자리한 신사에서 무사기원을 한 뒤, 갱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광산 쪽이 갱도 입구를 흙으로 쌓아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사진 길윤형 특파원
도착한 마을은 이미 패닉에 빠져 있었다. 이날 아침 해저 탄광에서 물이 새는 누수 사고가 발생해 갱도 입구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여전히 많은 광부들이 밖으로 피난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석호씨는 “사람들이 물이 차오른 갱도 입구에 모여 ‘아이고아이고’라고 곡소리를 내며 울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말했다. 사고가 터지기 며칠 전부터 누수를 우려하는 광부들의 보고가 이어졌는데도 회사 쪽에선 이를 무시한 채 조업을 강행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대형 사고로 인해 노동자들의 소요를 우려한 회사에서는 인근 사찰인 서광사(사이코지·西光寺)에 의뢰해 숨진 이들의 위패를 제작하고 조기 수습을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그때 생각을 하면….” 잠시 숨을 돌린 전석호씨가 얘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숨졌는데도 회사에서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일부 피해자에겐 보상금이 지급됐다는 증언도 있다), 살던 탄광 내 사택에서도 쫓겨나게 됐다”고 말했다. 새로운 거처는 그의 학교 동급생의 마구간을 수리한 공간이었다. 이후 그의 모친은 4남1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밀주 제조와 밭일 등 호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그는 “일본에서 고생을 하다 쇼와 19년(1944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처럼 사고의 희생자였던 조선인들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조세이 탄광의 비극은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잊혀지게 된다.

수십년 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비극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낸 이는 지역의 향토 사학자(당시 고교 교사) 야마구치 다케노부(2015년 사망)였다. 조세이 탄광이 자리잡은 야마구치현 우베시는 이전부터 해저 탄광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932년 개업한 조세이 탄광은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모집’ 형태로 동원된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통해 석탄 생산량을 급속히 늘려간다. 우베 지역의 중소규모 탄광이었던 조세이 탄광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아 ‘조선탄광’이라 불리기도 했다. 전석호씨는 “회사에선 조선에서 동원돼 온 이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함바(합숙소) 주변을 높은 벽으로 둘러쳐 자유 이동을 막고, 구타도 일삼는 등 사실상 포로 같은 취급을 했다”고 증언했다.

지역의 여러 사료와 증언 등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야마구치는 1976년 <우베지방사 연구>(제5호)라는 지역 학술지에 ‘탄광의 비상(非常)-쇼와 17년(1942년)의 조세이 광산 재해에 관한 노트’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이 글에서 “이 사고는 단순한 탄광 비상(탄광의 존망이 걸린 크고 위중한 사고를 뜻하는 탄광 용어)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인권 문제까지 포함한 문제는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사고를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니라, 일본이 직시하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봐야 한다는 관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지역엔 야마구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기억하려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1982년 4월 옛 탄광 터에 ‘조세이탄광 순난자의 비’라는 추도비를 만든다. 22일 오전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의 우치오카 사다오 공동대표의 안내를 받아 이 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비문엔 희생자들의 이름 대신 비를 만든 이들 13명의 이름과 함께 “(사고가 난 지) 40년을 맞는 현재에도 183명의 탄광의 사내들은 해저에 잠들어 있다/ 영원히 잠들라/ 평안히 잠들라/ 탄광의 사내들이여”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만 보면, 당시 사고로 숨진 이들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고, 포로와 같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다 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1932년 개업한 해저 ‘조세이 탄광’
10년만에 수몰사고…183명 숨져
“사실상 포로 취급” 증언도
사고 뒤 보상금 받지 못하고
가족들은 사택에서 쫓겨나기도

1990년대 한·일 시민사회 노력으로
고노·무라야마 담화 이끌어냈지만
보수정권 등장으로 사실상 형해화
일본 사회도 역사문제 싸고 혼미

추도비의 역사 인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1991년 2월, 50주년 추모 행사를 앞두고 비를 만든 주민들에게 “합동 추도식을 열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추도비 쪽 주민들은 “사고가 발생했을 땐 조선도 일본 땅이었다” “조선인이나 한국인에게 사죄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결국 야마구치 등은 한달 뒤인 3월18일 ‘현지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만든다’ 등 3가지 운동 목표를 내건 ‘새기는 모임’을 발족시키게 된다.

‘새기는 모임’이 활동을 개시한 1990년대 초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책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이를 촉발한 것은 1980년대 말 한국의 민주화였다. 이토 도미나가 <마이니치신문> 편집위원은 “60~70년대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이 운동의 실패 이후 각 지역으로 흩어져 고립됐다. 그러나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 이들에게 큰 자극을 줬고, 전후보상 문제를 매개로 전국이 다시 하나로 연결되게 된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선 1991년 8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등 그동안 군사정권에 의해 봉인돼 왔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보상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20~21일 우베시에서 열린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의 제8회 전국연구집회에 참여한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도비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사진 길윤형 특파원
이후 한·일 시민사회는 서로 연대해가며 양국 사회에 놀랄 만한 변화들을 이끌어낸다. 한·일 시민들은 1991년 12월 재판(김학순 할머니 등 9명이 처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공식 사죄를 요구한 재판)을 시작으로 일본 법원을 무대로 다양한 소송을 진행한다. 이 소송들은 1965년 한일협정 때 한국의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이유로 모두 패소하지만,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인정하고, 1995년엔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히게 된다.

한국 시민사회의 투쟁은 2004년 11월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발족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일본 시민사회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2005년 7월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이하 강제동원넷)라는 전국 조직을 발족시킨다. 강제동원넷은 이후 한국 위원회의 진상조사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매년 전국 활동가들이 한데 모이는 전국연구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 사회에선 이 같은 흐름에 저항하는 거센 역풍이 불기 시작한다. 이를 상징하는 것은 고노 담화가 나오던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아베 신조 등 우익 성향 젊은 정치가들의 대거 등장이었다. 이들은 1997년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 등을 결성해 지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해결하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후 고이즈미 정권(2001~2006) 등을 거치며 꾸준히 출세가도를 달려 2012년 12월 아베 제2차 내각의 출범과 함께 대거 각료로 기용된다. 같은 무렵 시민사회에선 개헌과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을 목표로 내건 ‘일본회의’라는 극우 단체도 결성된다. 일본 사회가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긴 혼미에 빠지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 사회에선 1990년대 한·일 시민사회의 투쟁의 성과물이었던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이 사실상 형해화되는 중이다. 그와 함께 일본 시민사회의 운동도 예전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우베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오바타 다이사쿠 ‘새기는 모임’ 사무국장은 21일 우베시에서 열린 강제동원넷의 전국 집회에서 “예전에 우리 모임의 (활동 내용이 전국 신문 등에 보도되는 등) 기세가 좋았던 때가 있었지만, 모임이 이를 살려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전국의 모임과 연대해 나가려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2013년 2월 사고 현장 바다가 보이는 지역의 땅을 매입해 “(이곳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토지·재산 등을 잃어버려 일자리를 찾으러 건너오거나 강제연행됐다. (중략) 우리는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추도비를 세웠다. 22일 현장에 놓인 조선인 희생자들의 명패 가운데 아직 본명을 찾지 못한 ‘나카무라 복돌’이라는 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고 현장이 보이는 해안에서 눈물을 다 닦아낸 전석호씨는 “살아생전에 해저 탄광에 아직도 묻혀 있을 아버지의 유골을 구해 꼭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사란 누구에겐 이미 지나버린 과거일 뿐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비극이다. 그의 소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 절망감이 밀려드는 백사장 위로 따스한 봄 햇살만 내리꽂혔다.

우베(야마구치현)/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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