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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28 19:25 수정 : 2019.05.28 19:41

[짬] 일본 다큐멘터리 감독 니시지마 신지

니시지마 신지 감독이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다큐멘터리 제작을 접느냐, 퇴사하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했죠. 그때 지금 만들지 않으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니시지마 신지 감독은 지난해 일본 후쿠오카에 본부를 둔 민영 RKB 마이니치방송을 그만뒀다. 입사 37년 만이었고, 65살 정년을 4년 남긴 시점이었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를 향한 ‘날조 배싱(공격)’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겠다고 제안서를 냈는데 회사에서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지금 일본 민간방송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프로그램으로 다루기 어려워요. 그래서 직접 다큐를 제작하려고 사표를 냈죠.”

지난 19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니시지마 감독을 만났다. 그는 이틀 앞서 ‘한일학생포럼’에 참가하는 일본 학생들을 이끌고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 전날엔 5·18기념식이 열린 광주도 들렀다.

<표적>. 그가 4년 남은 직장 생활과 바꾼 다큐 제목이다. 우에무라(가톨릭대 초빙교수) 기자는 1991년 8월1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실명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 기사를 <아사히신문>에 보도했다. 김 할머니의 서울 기자회견보다 사흘 앞선 첫 보도였다. 그뒤 피해 사실을 알리는 증언이 쏟아지며 오랜 기간 묻혀 있던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23년이 흘러 일본 우익의 ‘우에무라 때리기’가 시작됐다. 위안부가 아니라 ‘정신대’라는 표현을 썼다는 등의 이유로 ‘날조 기자’로 몰았다. 처음 보도할 때는 일본 여러 매체에서도 ‘정신대’와 ‘위안부’ 단어를 뒤섞어 썼지만 우에무라의 기사만 꼭 집어 겁박한 것이다. 이 여파로 우에무라 기자는 임용이 예정돼 있던 일본의 대학교수 고용 계약까지 취소당했다.

니시지마 신지 감독(왼쪽)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오른쪽).
왜 ‘우에무라 다큐’냐고 묻자 니시지마 감독은 “이상하다”는 표현을 썼다. “제가 1991~94년에 ‘RKB 마이니치방송’과 같은 계열인 <도쿄방송> 한국 특파원을 했어요.” 그는 기자로 입사해 2001년 피디로 직종을 바꿨다. 일본에선 종종 있는 일이란다. “특파원 때 우에무라 기자의 기사가 나갔어요. 저도 함께 위안부 기사를 썼죠.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표현은 저도 썼어요. 그런데 20년도 더 지나 우에무라만 공격하니 이상했어요. 4년 전 마침 후쿠오카에 강연하러 온 우에무라 기자를 처음 만나 다큐 제작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받았죠.”

이 다큐 기획안은 지난해 일본의 국제다큐멘터리 피칭포럼인 ‘도쿄 독스’에서 공동제작 지원 대상 15개 작품에도 꼽혔다. “일본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에이-포트’에서 4월 펀딩을 시작해 현재 190만엔을 넘겼어요. 8월까지 350만엔을 모으려고 해요. 제작은 올해 안에 끝낼 거예요.”

그는 피디 시절 일본이 저지른 전쟁 역사를 다룬 다큐를 주로 만들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말레이시아 코타바루 침략을 다룬 게 대표적이다. “전쟁은 반드시 제가 기록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일본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어요. 일본인들 대부분이 태평양전쟁은 진주만 공격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방위성 자료를 보면 진주만 공격보다 한 시간 앞서 코타바루를 공격했어요. 하지만 일본이 동남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어두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코타바루 침략을 가르치지 않아요. 다큐를 통해 일본이 미국과 동시에 동남아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역사를 알리고 싶었죠. 옛날부터 권력자는 역사를 자기한테 유리하게 왜곡하니까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첫 증언’
우에무라 기자 보도 때 한국특파원 근무
“23년 만에 왜 날조 공격하는지 이상해”
제작 제안 거부에 정년 4년 남기고 사표

크라우드펀딩 통해 제작비 모으는 중
“한·일 ‘역사 기록’ 시민 언론 다 중요”

그가 2년 전 만든 다큐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은 한국 교육방송의 ‘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재작년 9월 별세한 일본 기록작가 하야시는 일본이 저지른 강제동원의 역사를 끈질기게 추적해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한국 분들이 다큐를 보고 몰랐던 강제 연행 역사를 알려줘 고맙다고 했어요.”

그는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한국 특파원으로 일할 때”라고 했다. “서울에서 역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확산하는 시기였죠. 분신자살도 많이 목격했어요. 한국에서 국가 권력이 역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 버리는 걸 자주 봤죠. 그때 ‘권력과 미디어’, ‘역사 전달’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기자 시절인 1997년 그가 폐쇄된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의 역사를 담은 다큐를 만든 것도 그런 성찰의 결과였다. 이 탄광은 일제 강점기 때 징용된 수많은 한국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곳이다. 이런 다큐 열정을 보고 방송사에서 피디로 직종을 바꿀 것을 권했단다. “기자에게는 객관 보도를 요구하죠. 기자로서 한 인물이나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다큐 제작’은 쉽지 않아요.”

니시지마 신지 감독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왼쪽은 인터뷰 통역을 맡은 재일 언론인 문성희씨.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한-일 관계가 예전에 비해 좋지 않다’는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물었다. “일본 쪽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싶어요. 일본 국가권력이 역사를 제대로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게 한-일 관계 악화의 주요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요.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에서 국가주의가 점점 더 득세했어요. 아베 정권이 특히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지 않으려고 해요. 20년 사이에 크게 변한 거죠.” 그는 “일본에서 정확하게 역사를 알리려고 노력하는 신문이나 학자들에 대한 공격이 심해지고 있다”며 “일본이든 한국이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의 후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주 5·18도 역사에서 지우려는 움직임에 맞서 시민들의 힘으로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역사는 계승된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기록하는 큰 힘은 시민의 열정이죠. 언론도 중요하고요.”

다음 작품은 재일교포 문제를 다루게 될 것 같다고 했다. “후속 다큐의 주제로 한-일 관계를 생각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재일교포 문제를 살피려고 해요. 앞으로도 계속 일본 국가 권력이 전달하지 않고 있는 역사를 다룰 겁니다.”

그의 작품을 겨냥한 압박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권력 쪽 압박은 아직 없어요. 다만 다큐 제작을 만류하는 소리를 제 주변에서 듣긴 했죠. 제가 ‘침략 전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두고 비판을 받기도 했죠. 지금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이 과거 동남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몰라요. 국가 권력이 전달하지 않아서죠. 그러니 침략이란 표현도 수긍하지 않는 거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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