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0 19:50
수정 : 2019.10.10 23:11
고 김학순 할머니 피해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기자
일 우익 ‘날조’ 공격과의 싸움 계속
항소심 결심 공판에 한국서 응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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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삿포로고등재판소 앞에서 우에무라 다카시(가운데) 전 기자와 우에무라 전 기자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이들이 손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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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10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삿포로고등재판소 앞에서 귀에 익은 한국어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날 삿포로고등재판소에서는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자신의 보도를 “날조”라고 공격한 우익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결심 공판이 열렸다.
구호를 외친 이들은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김선주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양래 5·18 기념재단 이사 등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 회원과 지지자 12명이었다. 우에무라는 재판 뒤 이들 앞에서 “나는 이 재판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재판을 통해 이렇게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연대 투쟁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에무라는 2015년 사쿠라이와 사쿠라이의 칼럼 및 기사를 실은 잡지사 2곳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사죄 광고를 게재하고 각 550만엔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법정 투쟁’은 녹록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삿포로지방재판소는 사쿠라이의 칼럼이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린 것은 맞지만 사쿠라이의 글 자체는 해당 사안을 진실한 것으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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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삿포로고등재판소 앞에서 우에무라 다카시(앞줄 왼쪽 셋째) 전 기자와 우에무라 전 기자를 지지하는 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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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가 우에무라의 위안부 피해 기사를 날조라고 공격한 구실은 우에무라가 1991년 보도한 기사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정신대로 연행됐다”고 썼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는 위안부 피해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많은 언론사와 운동단체에서도 두 용어를 혼용했다는 사실을 사쿠라이는 의도적으로 눈감은 것이다. 우에무라는 재판정에서 “나를 표적으로 삼아 날조라고 비판하는 것은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소리 높여 말했다.
이날 재판이 열린 802호실은 우에무라를 응원하기 위한 일본 시민 80여명으로 방청석이 꽉 찼다. 우에무라 변호인단 20여명도 변호인석을 꽉 채워 간이의자를 따로 마련하기까지 했다. 사쿠라이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사쿠라이 쪽 변호인단은 구두 의견 진술을 아예 하지 않았다. 재판장은 우에무라와 변호인 의견 진술만을 들은 뒤 재판 시작 30여분 만에 “선고는 내년 2월6일에 하겠다”는 한마디만 하고는 재판을 끝냈다.
김언경 민언련 사무처장은 “이 사건은 우에무라의 기사를 날조라며 우익이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 일이다. 한국에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저널리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신홍범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은 “우에무라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싶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양래 5·18 기념재단 이사는 “한국 군사독재 시대에 변호사들이 (민주화운동 인사를 위해) 무료 변론을 하는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고 했다.
우에무라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표적>을 만들고 있는 일본 영화감독 니시지마 신지는 “일본에서는 최근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없었던 것처럼 하려는 움직임이 많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 일본이 전쟁을 저질렀던 것처럼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삿포로/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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