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방수인ㅣ영화감독
영화 <덕구>의 시작은 ‘그리움’이었다. 대학생 시절 식당에서 일하는 필리핀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로 인하여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국적을 넘어 평범한 스무살이었고,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콜콜한 농담에 웃고 떠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친구 중 한 명이 한국 남자가 멋있고 다정하다며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한국에 정착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몇 년 후 문득 그 친구가 떠올랐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말 한국 남자와 결혼을 했는지….’ 한국의 국제결혼율이 높아지면서 문득 친구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방을 돌아다니며 8년간 인터뷰를 하였고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덕구 할배’와 ‘덕구’ ‘덕희’ 그리고 내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바네사’가 나오게 되었다.
영화 <덕구>는 덕구 할배와 손주 덕구의 이야기다. 그리고 덕구네 가족 구성원 중 엄마는 ‘인도네시아’ 사람이다.
영화를 개봉했을 때, 인터뷰 속 필수로 들어간 질문이 ‘다문화 가족’이었지만, 처음부터 다문화 가족을 부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을 뿐이다. ‘현재 가족 구성원에 다문화는 이미 정착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그것을 부각하거나 확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문화 가족을 낯섦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았고, 가족의 소중함이나 다문화의 미래 등에 대해 한 편의 영화로 이해와 정의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다. “나는 세상이 무너져도 덕구 할배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세상이 어떻게 바뀌건 간에 가족은 가족일 뿐이다.
<덕구>는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개인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오늘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발견하게 될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으로부터 위로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나에겐 네 살 난 아이가 있다. 어느 날 아이가 자라서 향유고래가 되고 싶다고 했고 “왜?”라는 질문에 “마음이가 멋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음이가 멋지다’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해 향유고래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고,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한 기형 돌고래를 향유고래가 제 새끼인 양 보듬는 영상을 봤다. 향유고래는 다른 동물과 교류하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아마 이 영상을 보며 아이는 약자를 품어주는 향유고래가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았다.
영화 <덕구>에서 덕구가 할아버지와 갈등을 겪다 집을 나가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 그다음에는 슈퍼 할머니, 그리고 마을 이장님과 덕구 친구들, 마지막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덕구를 찾아 나선다.
혈연관계의 가족이 아닌 살면서 맺은 인간관계 속에 확장되는 관계, 향유고래처럼 다른 구성원을 보호하고 품어줌으로써 형성되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덕구>를 촬영할 때만 해도 나는 결혼에 관한 생각이 없었다. 주변에 기혼자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혼자 혹은 결혼을 했어도 딩크족이 많았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친구, 다문화 가족도 있었고, 반려견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에게 ‘다양한 가족’이라는 질문은 되게 낯설게 느껴진다. 앞서 말한 내 친구와 가족들이 ‘다양’이라는 단어로 구분되는 듯한 느낌이 들고 거리감마저 들게 한다. ‘가족’이란 단어에 수식어는 필요 없다고 본다. <덕구>를 찍으면서도 똑같은 사람을 구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 생각하여 ‘다문화’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만 해도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고 혈연이라는 소속감을 강요하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의미는 강조보다는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연대감, 공동체 의식 등이 확장되는 것이 진정으로 ‘가족’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