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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이건희 컬렉션’과 능력주의

등록 2021-07-07 16:13수정 2021-07-08 02:05

왜냐면

홍성규ㅣ화성노동인권센터 소장

경기 화성시 시민사회단체들은 처음으로 ‘시의회 시민모니터링단’을 구성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203회 정례회가 시작되던 6월10일 본회의에서 ‘자유발언’을 신청한 의원이 있었다. 국민의힘 대표의원이기도 한 임채덕 시의원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40년간 평생 모아오신 미술작품들은 세계 다섯번째로 큰 박물관을 만들 수 있는 규모다. 경기도 지자체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유치 희망을 표방하고 나섰다”며 “어찌 된 일인지 화성시는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화성시와 삼성전자는 전략적 동반성장 관계다. 자신감을 갖고 ‘이건희 컬렉션 박물관’을 준비하여 화성의 문화적 수준을 격상시켜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모니터링 평가지를 앞에 두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긴, 최근 전국 곳곳에서 난리도 아니다. 인근의 평택시, 수원시, 안산시는 물론 경기도 차원에서도 경기 북부에 건립해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전국적으로도 부산 해운대구, 대구시, 세종시, 대전시, 전남 여수시 등 곳곳에서 유치 경쟁에 나섰고, 부산·대구·울산·경북·경남 등 영남권 5개 시장·도지사들은 ‘공개모집을 거쳐 지방에 건립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미술관 건축비는 물론 구청 청사까지 제공하겠다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와 정의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하게 되었을까? 안 그래도 30대 최연소 제1야당 대표의 취임과 동시에 ‘공정’ 담론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판이다. 그런데 왜 다들 ‘이건희 컬렉션’에 대해서는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고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칭송하기에만 바쁜 것인가?

이른바 ‘삼성의 사회기부’ 발표 직후, 대부분 언론의 기사 제목은 ‘이건희, 13년 전 사재출연 약속 지켰다’였다. 국민 앞에 했던 무거운 약속을 왜 무려 13년 동안이나 지키지 못했는가의 문제도 엄중히 따져 물어야 할 것이며, 13년 전에 왜 그런 약속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분명하게 되짚어봐야 한다. 2008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 비자금’ 사건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비자금은 ‘법을 피해 비밀리에 축적한 자금’, 즉 범죄수익이다. 당시 특검은 무려 4조5000억원대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957개 계좌에 분산시켜 관리했다고 발표했다. 차명계좌는 당연히 금융실명제법 위반이며 50%의 과징금이 따른다. 즉, 밝혀진 액수로만 보더라도 2조2250억원 정도를 무조건 과징금으로 징수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분노스럽게도 물론 징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이번에 내놓은 1조원은 애초 냈어야 할 벌금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요약하면, 벌금 낼 돈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기부한다면서 이처럼 떠들썩한 환영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과연 이것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상황인가? 출발이야 어찌 됐든, 과정이야 어찌 됐든, 내놓은 미술품들이 국보급이니 일단 환영해야 할 일 아니냐고? 이런 식이라면 반민족친일행위로 축적한 부와 재산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더욱 참담하고 개탄스럽다. 최근 열풍처럼 불고 있는 ‘능력주의’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일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출발선이 같든 다르든, 기회가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과정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상관없이 오직 그 결과로서 산출된 ‘능력의 거대함’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만 한다면, 단언컨대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지자체들의 노골적인 유치 경쟁은 7일 결국 서울로 결정이 되면서 무위로 돌아가는 듯하다. 이제 결정에 반발하는 제2의 논쟁이 벌어지는 분위기다. 속마음까지야 알긴 어려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화성시의 침묵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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