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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혐오규제’ 국회는 왜 대답이 없나

등록 2021-07-14 16:52수정 2021-07-15 02:38

‘대학 공론장의 미래’ 연쇄기고 _2

[왜냐면] 양승연 대학생 공동체 ‘유니브페미’ 집행위원·대학 4학년

길을 걷는데 누군가 나와 일행에게 오물을 뿌린다. 오물을 뿌린 이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런 경우 보통 우린 오물을 뿌린 이를 찾아 더러워진 옷을 배상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오물을 뿌린 것에 대해 법적으로 처벌하거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규정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한다면? 황당하게 들릴 이 가정은, ‘혐오표현’에 대입하는 순간 현실이 된다. 혐오표현의 해악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 해악을 인정하고 대응하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몇년째 좌절을 겪고, 다수 정치인 또한 지지율을 우려해 차별과 혐오 문제에 함구하면서 우리 사회 공적인 영역에서 해당 문제들을 다루거나 혹은 해소를 위해 공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행법상 혐오표현을 규제하고 대응할 근거가 없진 않으나, 여전히 혐오표현이 잘못된 행위임을 규정하는 선언 혹은 명확하고 직접적인 근거가 없어 혐오표현에 실제 대응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유통되는 혐오표현의 경우, 이를 불법 정보로 규정할 수 있는 법 제도가 존재하지 않아 규제 실행에서의 고초가 크다. 혐오표현의 공적 해악은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적 법익 침해로만 한정하여 해석하거나, 혐오표현에 대한 납작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항 표현마저 일괄 삭제 조치하는 등의 처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를 위한 근거 법안이 더 늦기 전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가 대학이라는 실질적 삶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익명성, 전파·증폭 효과 등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 사회는, 국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걸까. 대학 간 여성주의 공동체인 유니브페미는 지난해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내 혐오표현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혐오표현 규제를 위한 근거 법안을 제정하여 혐오표현에 대항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차별에 대해 다루는 한편, 혐오표현 규제 법안은 감정과 표현의 영역에 대해 다루며 이원화된 법률 체계 아래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다. 다만, 해당 근거 법안이 ‘처벌’에 초점을 둘 경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가능성과 처벌을 피해 발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등 법안에 대한 반발감만 고조시킴으로써 혐오표현 규제 법안의 실효를 약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혐오표현 규제 근거 법안은 혐오표현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규정하여 혐오표현이 어떤 해악을 갖는지 설명하고, 혐오표현에 반대한다는 국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공적 선언의 측면이 부각되어야 한다.

둘째,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성을 고려한 보완적인 법률들을 제·개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혐오표현 규제 근거 법안의 제정과 더불어 ‘정보통신망법’ ‘고등교육법’의 개정을 통해 각 책임 주체의 자율규제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정보통신망법의 개정을 통해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혐오표현 유통 방지 책임자를 지정하고 혐오표현 실태 및 모니터링 결과를 담은 혐오표현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등교육법 개정을 통해서는 인권센터에 차별·혐오표현 문제 대응 및 예방 의무를 부여하고 온라인 혐오표현 실태조사 실시 등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구조적인 문제인 혐오표현에 대해 입법적 대응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과 차원의 대처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제공자와 대학당국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혐오표현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혐오표현 규제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역시 제시되어야 한다. 혐오표현 규제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되거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혐오표현으로 인해 소속된 공간과 발언권을 잃은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돌려줄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라는 측면에서도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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