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그린피스 동아시아 프로그램 국장
지난 14일 유럽연합이 탄소국경세 법안 초안을 발표했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국가에서 배출량이 적은 국가로 상품이 수출될 때 해당 제품에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다.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이라는 구호 속에 당선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우방국에 기후변화 해결을 위한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유럽 탄소국경세 발표와 비슷한 조처를 할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된다.
이제 우리는 기후변화 대신 기후위기라는 표현을 쓴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과 산불, 견딜 수 없는 폭염은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전력사용량이 많은 산업의 재생에너지 전환이 시급하다. 특히 정보통신기술(ICT·아이시티) 산업은 2019년 세계 전력소비량의 5~9%에 해당하는 2만2500TWh(테라와트시)가량을 사용했는데, 산업 성장 속도가 빨라 2030년엔 전체의 20%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빠르게 몸집을 키워온 아이시티 기업은 이제 기후위기 대응을 놓고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탄소국경세가 유럽과 미국 등에서 가장 빠른 기후위기 해결책으로 도입될 경우,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아이시티 기업들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2020년 글로벌 100대 아이시티 기업 명단에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11위로 이름을 올린 삼성전자(이하 삼성)의 기후위기 대응에 특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9년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며 휴대전화, 티브이,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일인자로 자리 잡은 삼성은 미국 가전 시장에서도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베트남에 있는 삼성의 최대 스마트폰 제조시설에서 발생하는 수출액은 베트남 수출 총액의 25%에 이르며, 삼성의 매출 총액은 우리 국내총생산(GDP)의 13%가량을 차지할 정도다.
그러나 우수한 매출 실적과는 달리, 삼성의 탄소중립 의지는 상당히 미약해 보인다. 6월 말 그린피스에서 발표한 ‘삼성전자 100% 재생에너지 로드맵’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은 미국과 유럽, 중국 사업장에서 2년 만에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했다고 선언했으나, 실제 성과는 ‘부분적’이었다. 삼성의 재생에너지 전환은 온실가스 감축 기여도가 낮은 조달 방식인 ‘언번들 REC(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와 녹색요금제가 전체의 88%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0년 기준으로 삼성은 사용하는 총전력의 82%를 화석연료로 조달했다. 주요 생산거점인 한국과 베트남 사업장의 100% 재생에너지 전환 목표조차 수립하지 않았다. 애플, 구글을 비롯한 글로벌 아이시티 기업들이 일찌감치 ‘RE100’(재생에너지로만 100% 전력 사용) 목표를 세우고 재생에너지 전환에 힘쓰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제품이 유럽의 탄소국경세 규제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여전히 재생에너지 전환을 단순한 규제 충족 비용으로 여기는 것 같다.
이제 기후재앙은 탄소배출권과 탄소국경세라는 추가적 비용 부담으로 기업을 압박하며 화석연료와의 ‘손절’을 요구하고 있다. 혁신적인 기업은 규제 전 상황을 예측하고 변화를 꾀한다. 삼성이 뒤처진 사이 제품에 탄소국경세가 부과된다면, 그때도 사람들은 삼성 제품을 지금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