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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다시,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등록 2021-08-04 20:15수정 2021-08-05 02:35

[왜냐면] 정위지 | 40대 서울시민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어벤져스는 외계침략자들과의 전투 중에 민간인들을 사망케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민간인의 사망과 신체적 피해, 재산상 피해를 가지고 왔고 이 때문에 어벤져스는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국가로부터의 통제와 개인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한국전쟁의 경우, 국가는 철저한 반공 정책으로 이념이 다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반공을 내세운 그 어떤 폭력마저도 정당하게 만들었다. 유가족은 군인과 경찰에 의한 학살을 입 밖에 꺼내기는커녕 2차 가해가 두려워 공포에 떨어야 했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중 조 바이든 정부는 한국전쟁 참전 군인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고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훈장 수상자 옆에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한국전쟁의 승리자의 입장에 서서 함께 승리를 기뻐했으나 우리가 맹신해왔던 이념과 승리가 실상 민간인 학살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참전용사의 훈장 수여 장면을 마냥 기쁜 마음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이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일제를 상대로 함께 싸웠지만 광복 뒤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분할통치하면서 이념 간 싸움이 시작된다. 남한 정부는 좌익 성향의 사람들을 정부가 직접 관리·교육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관변단체를 만든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헌병과 경찰은 제일 먼저 이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죽이고, 인민군이 점령했던 마을에서 인민군에게 쌀 한톨이라도 제공했던 마을 사람들을 골짜기로 데려가 총기를 난사하였다. 미군 역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피학살자는 대략 1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과거사 정리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으로 국가를 대표해 피학살자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죄하였다. 노무현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한 김동춘 전 상임위원은 2013년에 발간한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를 통해 진실규명과 유해 발굴·보존, 기록 보존, 위령사업, 가해자 책임 묻기와 피해자 명예회복 및 화해에 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친일파 기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이고, 반공의 가면을 쓰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친일의 죄를 사면받아 대한민국 1등 시민이 된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진실을 파헤치는 것보다 진실을 덮으려는 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김동춘 전 상임위원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에서 과거사 정리는 국가의 기본틀을 만들고, 정의를 바로 세우고, 국가와 국민 간의 신뢰 사회를 만드는 일임을 강조한다.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 업무 과부하가 걸린 문재인 정부에 굳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책을 언급하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다음에 어떤 정부가 들어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정부가 다시 나타나게 될까. 과거사를 정리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건설하는 작업만큼이나 중요하다. 전쟁 뒤에는 반드시 피해자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기억도 죽어서 돌이킬 수 없다. 팬데믹이라는 물리적인 전쟁이든 기억과의 전쟁이든 진정한 승리자는 어느 한쪽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과 진정성이다. 소수만이 기억하는 과거가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공부하는 역사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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