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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시행령안을 바로잡아야 한다

등록 2021-08-18 15:46수정 2021-08-19 02:36

[왜냐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도 위기 연쇄기고 _3

김현주|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한 대기업에 몇년간 안전보건 자문을 했었다. 하청노동자들이 밀폐 공간에서 질식으로 사망재해가 발생했던 회사였다. 그 최고경영자가 외부전문가를 만나 귀 기울이는 모습에서 산재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그 뒤 이 회사는 큰 공장을 새로 지었는데 놀랍게도 중대재해가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자체적 전면 작업중지를 하면서까지 안전을 챙겼다고 했다. 경영책임자가 관심을 가지면 중대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재해를 방치하여 국민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다.

국회는 국민 10만명이 발의한 이 법안에 대하여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 유예,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라는 커다란 사각지대를 만든 채 법안을 통과시켰다. 중대시민재해 관련 공중이용시설과 중대산업재해 관련 직업성 질병자의 정의를 시행령으로 위임하였다. 기업안전범죄의 특성을 고려하여 도입이 필요했던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삭제하였다. 건설공사 발주처와 공무원의 책임 조항도 삭제하고, ‘경영책임자 등의 의무범위’는 시행령으로 위임한 미완의 법률이다. 시행령안이 입법예고된 뒤 민주노총, 더불어민주당 산재티에프(TF), 한국노총, 경총 순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시행령안을 검토하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사회 중대재해의 무거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로 중대시민재해 관련 시행령안에서 공중이용시설의 정의를 적용하면 판교 환풍기 사고 참사, 광주 학동 건물 참사, 구미 불산 누출 사고를 일으킨 기업은 중대재해처벌법에 의해 경영책임자의 의무 위반 여부를 따져볼 기회조차 없게 된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생활용품은 원료 및 제조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국민들은 사회적 참사를 유발한 기업들이 무죄 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정의를 회복하는 사회를 원하지만 법안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둘째로 과로 관련 뇌심혈관 질환 등 주요 직업성 질병이 중대재해에서 제외됐다. 추락사로 사망하는 노동자도, 과로사하는 노동자도 한해 각각 약 500명이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뇌심혈관 질환을 포함하여 이미 산재보상법에서 인과관계를 충분히 검토하여 제시한 질병 목록에 근거하여 정의하자는 의견을 학술연구용역보고서를 통해 제출하였지만, 고용노동부는 시행령안에 일부 급성중독만 포함시켰다. 소화기 제조 업체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열거한 목록에 없었던 화학물질에 의한 간염으로 노동자 2명이 사망한 사건의 교훈은 해마다 300~400여종의 신규 물질이 도입되고 있는 산업 현장에서 사업주는 모든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관리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시행령안은 ‘경영책임자 등의 의무범위’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규정하여 기업이 쉽게 처벌을 면할 위험이 크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중대재해처벌법이 있는 나라들에서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책임 구성 요건은 상세한 의무 규정이 아니라 안전을 확보할 포괄적 의무에 근거한다. 안전 관련 범죄의 특성상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또는 열거된 조항들이라도 지키면 조금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찬성하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 재판 경험이 있는 변호사들은 그동안 사법부의 판결 경향으로 볼 때 협소한 규정만 지키면 처벌을 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실상 면책 조항이라고 심각하게 우려한다. 경영계는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규정해야 그 의무를 지킬 수 있다고 한다. 경영계 토론회에서 어떻게 하면 처벌을 피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산재 사망을 줄일까를 생각해달라고 고용노동부 쪽이 기업들에 당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이대로 제정할 수는 없다. 19일 오늘 ‘중대재해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준)’은 시행령안 검토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국회는 국회법에 따라 입법 취지를 훼손하는 시행령안을 바로잡아야 한다. 시행령 공표 주체인 대통령에게 기업의 안전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고 국민의 안전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시행령을 제정해주십사 간곡한 부탁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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